지난달 30일 비무장지대(DMZ)에서 열린 남·북·미 정상의 깜짝회동을 “리얼리티쇼 같았다”고 하는 사람이 많다. 꼭 나쁜 뜻만은 아니다. 분초 단위로 치밀하게 기획된 기왕의 정상회담과는 달리 형식도 내용도 그만큼 파격적이었다. “판문점에서 헬로하자”는 트럼프의 트윗부터 실제 만남의 성사까지 32시간은 한반도 역사에 남을 명장면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행동으로 적대관계 종식과 새로운 평화시대의 본격 시작을 선언했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해석을 편들고 싶은 이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대통령이 빠진 상태로 1시간 가까이 비공개 진행된 트럼프와 김정은의 단독회담을 지켜보면서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중재자를 자처하더니 이제는 객으로 전락했다”는 야당의 평가까지는 아니어도 내심 씁쓸했다. 인공기와 성조기만 나란히 걸린 회담장 화면 위로 66년 전 정전협정 광경을 떠올린 이도 있었을 것이다. 그때 북한 미국 중국이 참석한 조인식 어디에도 남한의 자리는 없었다.
트럼프가 지금까지 국내외 문제를 처리하면서 보여준 행태는 우리가 아는 미국 대통령 중 가장 예측 불가능한 모습이다.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인정해 전 세계 무슬림의 반발을 사고 “군비를 더 내라”며 나토(NATO) 국가들을 예사로 위협한다. 북핵 문제도 마찬가지다. 김정은을 “꼬마 로켓맨” “병든 강아지”라고 조롱하더니, 지금은 “사랑에 빠졌다”는 말도 서슴지 않는다. 북한이 쏜 단거리 미사일에는 “신뢰 위반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감싸기까지 했다. 문제는 그게 트럼프의 협상 전략이라 해도 그 전략의 지향점이 미덥지 못한 데 있다.
‘미국 본토를 겨냥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만 아니면 북한 핵무기를 동결 수준에서 끝낼지 모른다는 의구심’ ‘말의 성찬과 휘황한 이벤트가 지나간 뒤 어느새 핵보유국으로 인정받은 북한’. 재선을 위해 무엇이든 할 것 같은 트럼프를 보면서 우리가 ‘핵을 머리에 이고 사는’ 최악의 상황을 상정해보지 않는다면 그게 구제불능의 무책임함일 것이다.
김정은은 아예 북미 협상에서의 남한 배제를 노골적으로 천명해왔다. 문 대통령을 향해 “오지랖 넓은 중재자 행세 그만하라”고 거친 말을 쏟아내던 북한은, 이번 북미회담 당일 아침까지도 비핵화의 실질적 진전을 요구한 대통령의 북유럽 순방 당시 발언을 물고 늘어지며 “어이없고 괴이한 주장”이라고 비난했다. 회담 성사 직전엔 북한 외무성 미국담당 국장이 나서 “조미(朝美) 대화의 당사자는 우리와 미국”이라며 “협상을 해도 남조선 당국을 통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못 박기도 했다. 딴 곳도 아닌 판문점 남측 자유의집에서 북미회담이 열렸는데도 문 대통령이 빠진 게 이런 북한의 태도와 정말 무관할까.
‘백주몽(白晝夢)과 같은 11분간의 휴전협정 조인식은 모든 것이 상징적이었다. 너무나 우리에게는 비극적이며 상징적이었다. 학교강당보다도 넓은 조인식장에 할당된 한국인 기자석은 둘뿐이었다. 유엔 측 기자단만 하여도 약 100석이 되고 참전하지 않은 일본인 기자석도 10명을 넘는데 휴전회담에 한국을 공적으로 대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볼 수 없었다. 이리하여 한국의 운명은 또 한번 한국인의 참여없이 결정되는 것이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열린 정전협정 조인식을 보도한 최병우의 이 기사는 한국 언론사의 명문으로 남았다. 조인식에 한국 대표가 참석하지 않은 것은 이승만 대통령이 강하게 반대한 데다 작전지휘권을 유엔군 사령관에게 이양한 까닭도 있다. 물론 갓 신생 독립국이었던 그때와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 된 지금 한국의 위상이 같을 순 없다. 이번 DMZ 회동도 문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깔아준 판 위에 가능했다는 점에서 주객의 상황은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그런 만큼 북핵 문제에 있어 한국의 주도권은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해져야 한다. 북한 핵무기의 위험은 온전히 대한민국 국민들이 감당해야 하고, 비핵화에 필요한 비용 청구서도 결국 우리에게 날아들 것이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김정은을 백악관으로 초대했고, 김정은도 트럼프를 평양으로 초대한다는 뜻을 밝혔다고 한다. 북한이 정상국가로 나아가기 위해 김정은이 워싱턴 방문을 꺼릴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 전에 할 일이 있다. 이미 약속해놓고 이행하지 않고 있는 서울 답방이다. 9·19 평양공동선언에 담긴 마지막 조항 말이다. 트럼프의 트윗 번개 제안에도 응했던 김정은이다. 이 약속의 실행 여부를 보면서 남한 사람들은 김정은이 남한을 북핵 문제 해결의 당사자로 생각하는지, 아니면 언제든지 빼내 쓸 수 있는 현금주머니 정도로 여기는지 판단할 것이다. 그들 말대로 민족이 먼저라면 민족끼리의 약속 이행도 먼저여야 한다.
논설위원 flut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