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 나무가 없다면 어떨까. 지우개로 도시의 초록을 지워본다. 회색 콘크리트와 차가운 유리와 도금된 쇠붙이들과 끈적한 아스팔트 사막이 남는다. 사람과 건물과 차들이 우글대는 도시를 숨 쉬고 살 만하게 만드는 것은 나무들이다.
꽃 보자고 심는 나무가 있다. 열매 얻자고 심는 나무가 있다. 가시 보자고 심는 나무가 있다. 울타리 탱자나무다. 잎 보자고 심는 나무가 있다. 가을에 잎이 아름다운 나무다. 색 보자고 심는 나무가 있다. 세상의 무성한 초록이 사라지는 겨울, 몸과 영혼은 초록을 그리워한다.
수형의 아름다움을 취하는 나무가 있다. 나무의 수형은 기쁨을 준다. 전지가위는 인위적으로 정원의 향나무 수형을 다듬어준다. 영화 ‘가위손’은 나무를 다양한 동물의 모양으로 다듬어 보여준다. 파리의 플라타너스 가로수는 두꺼운 담처럼 장방형으로 다듬어져 있어 낯설고 아름다웠다.
메타세쿼이아의 수형은 다른 차원의 아름다움이다. 다듬지 않은 본래 수형, 본색의 아름다움이다. 평면상 훤칠한 이등변 삼각형이지만 사방으로 보면 우듬지가 뾰족한 원뿔 모양이다. 한 그루일 때 몸은 일상의 땅에 뿌리박고 있으나 때 묻지 않은 정신은 하늘로 비상하는 현자 같다. 수십 수백 그루가 늘어설 때 침묵으로 수행하는 초록 성자의 긴 행렬 같다. 가로수들은 나란히 평행으로 두 줄로 선 채 어딘가 우리가 알지 못할 곳으로 걸어가는 것 같다. 그 행렬을 따라가면 쓸데없는 말이 멈추고 헛된 욕망이 스러지는 성스러운 사원의 문으로 들어가게 될 것 같다.
부산에도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가 있다. 노포동 시외버스터미널을 지나 울산 방향 7번 국도가 시작되는 곳이다. 메타세쿼이아 가로수라고 하지만 무언가 애매하다. 이곳의 가로수에서는 아름다움도 장엄함도 숭고함도 느껴지지 않는다. 중동이 뭉텅 잘려나간 나무가 많아서이다. 잘린 나무들은 수형이 원뿔이 아니라 둥글둥글 부스스한 더벅머리 모양이다. 원래의 뾰족한 정수리를 회복하고자 우듬지 새순이 삐죽하니 자라나긴 하지만, 모양이 빠진다. 잘못 만들어 붙인 도깨비 뿔 같고, 꽁지 빠진 수탉 같다.
왜 저렇게 정수리를 뭉텅 잘라버렸을까. 다시 보니 굵은 전선이 나무 위를 지나간다. 전신주 사이사이에 묘목을 심었을 것이다. 어린 나무는 키가 작았을 것이다. 나무는 쑥쑥 자랐을 것이다. 몇 년 만에 전신주만큼 자랐을 것이다. 전신주도 나무처럼 키가 쑥쑥 자라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전신주는 자라지 않고 나무만 자랐다. 가만 내버려두었으면, 나무는 전신주보다 더 크게 자랐을 것이다.
전신주 키에 맞춰, 전깃줄 높이에 맞춰, 메타세쿼이아 둥치 중간이 뭉툭 잘려나간 것이다. 침대 길이에 맞춰 여행자의 발목을 자르던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따로 없다. 저 나무를 도시의 가로수로 계획한 사람은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생각이 있기나 했을까.
카페 앞 은행나무 가로수는 가지 사이에 여러 가닥의 굵은 전선을 얹고 있다. 정수리가 잘려나간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못지않게, 가지 사이에 전선들을 무겁게 지고 견디는 은행나무 가로수도 고단해 보인다. 심지어 전선들은 위험해 보인다. 나무들이 자라면 전선이 짧아져 합선되는 것 아닌지 걱정도 된다.
도시의 가로수는 도시의 반려식물이다. 말없이 주기만 하는 반려식물이다. 그늘을 주고, 호흡에 도움을 주고, 마음의 평온을 주지만, 반려식물의 고단함은 쉽사리 헤아려지지 않는다. 어디에 어떤 나무를 심는 것이 더 적절한지, 한 번만 더 고민했더라면, 메타세쿼이아는 도시의 꽁지 빠진 수탉 같은 신세는 면했을 것이다.
백 년 계획이라는 사람 기르기는 어떨까. 근시안 어른의 전지가위가 아이 본성의 정수리를 자르는 것은 아닐까. 아이를 엉뚱한 자리에 세워놓고 서툰 전지가위질로 꿈의 우듬지를 자르는 것 아닐까. 반려식물에 대한 예의는 결국 사람에 대한 예의가 된다. 적절한 장소에 서는 것은 드문 행운이다. 엉뚱한 장소와 불편에 난감한 것이 삶일까.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