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 선생의 대하소설 ‘토지’가 떠올랐다. 순전히 개인적인 감성이다. 시대를 앞서간 천재성. 이 역시 적절한 말인지 모르겠다. 호주제 관련 뉴스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훗날 벌어질 일을 어떻게 알았을까.
소설 ‘토지’를 처음 접한 것은 1980년 중학교 졸업을 앞둔 1월 겨울방학 때였다. 그때 개인적으로 놀랐던 것 중 하나는 문학성 같은 고귀한 주제가 아니었다. 소설 주인공인 ‘최서희’의 아들들이 가진 성이었다. 양반가문의 무남독녀 ‘서희’는 두 아들에게 남편 ‘길상’의 김 씨가 아닌 자신의 최 씨를 붙여줬다.
이런 내용이 나오는 ‘토지’ 2부는 1972년 10월부터 1975년 10월까지 만 3년 ‘문학사상’에 연재됐다고 한다. 박경리 선생은 세월이 흐르면 호주제가 폐지될 것이란 사실을 미리 알았을까. 우리나라 호주제가 폐지된 것은 2005년. 박경리 선생은 30년 전부터 호주제를 부정하는 소설을 구상했던 것이다. 소설 속에는 거대한 사회적인 의미를 구체적으로 부여하는 내용이 있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냥 ‘서희’ 아버지인 ‘최치수’의 사망으로 끊겨버린 최참판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당시 미풍양속을 저해한다며 논란이 될 만한 내용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을 듯하다.
호주제 폐지는 오랜 세월, 숱한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 번 트인 물꼬는 거침없다. 얼마 전 국가인권위원회가 장손을 ‘장남의 장남’으로만 규정하면 차별이라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내용이 재미있다. A 씨 아버지의 외할아버지는 독립운동가 B 씨로 슬하에 4남매를 뒀다. A 씨의 할머니는 첫째였고 한국에 남은 B 씨의 유일한 자녀였다. B 씨의 두 아들이 한국전쟁 때 북한으로 갔고 막내딸은 일본 국적을 취득했기 때문이다. A 씨는 자신의 아버지와 자신만이 성별을 떠나 B 씨의 후손인 만큼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라 취업 지원 혜택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국가보훈처는 사회적 관습에 근거할 때 장손을 ‘장남의 장남’으로 보는 것이 원칙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인권위는 헌법에 배치된다며 구제방안을 마련하라고 권고했다.
최근 이런 일도 있다. 민법 781조(자는 부의 성과 본을 따르고 다만 부모가 혼인신고 때 모의 성과 본을 따르기로 협의한 경우 모의 성과 본을 따른다)의 부성주의 규정이 성차별이라며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이 일고 있다. 전문가들은 출산 때 자녀의 성을 자유롭게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상 참 많이 변했다는 말이 나올 만하다.
정순백 논설위원 sbjun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