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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韓·日 “응답하라, 1998” /차재원

  •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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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9-07-14 19:09:27
  •  |  본지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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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9월 4일 이른 아침 일본 도쿄역 오사카행 신칸센 플랫폼. 갑자기 사위가 바빠졌다. 보안요원과 취재진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곧이어 당시 일본 오부치 게이조 총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막 열차에 오르려던 김종필 총리는 오부치 총리와 반갑게 악수를 나눴다. 잠깐의 스탠딩 환담 이후 김 총리 일행을 태운 열차가 사라질 때까지 오부치 총리는 손을 흔들었다. 일본 총리가 자국을 방문한 외국 귀빈 환송을 위해 공항도 아닌, 기차역까지 나온 경우는 처음. 현지 언론은 속보로 전했다. 당시 총리실 출입기자로 동행 취재에 나섰던 필자도 비중 있게 보도했다. 사실 김 총리의 일본 방문은 파격의 연속이었다. 숙소부터 영빈관이었다. 그가 DJP(김대중·김종필)연합 정권의 대주주로, 실세 총리로 불리긴 했으나 엄연히 정권의 2인자. 정상급 국빈에게만 제공해온 영빈관을 선뜻 내준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이어 아키히토 일본 천황이 황궁으로 초청해 오찬까지 베풀었다. 한국 총리로선 처음 있는 일. 물론 김 총리가 한국을 대표하는 지일파(知日派) 정치인이라 배려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돌았다. 하지만 다수의 분석은 당시 순풍에 돛 단 듯하던 한일관계에 힘입은 바 크다는 쪽에 맞춰졌다.

바로 그 전 해인 1998년 10월 김대중 대통령은 일본을 방문해 오부치 총리와 회담 뒤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채택했다. 오부치 총리는 이 선언에서 과거사와 관련해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표했다. 김 대통령은 “화해와 선린우호협력에 입각한 미래지향적인 관계 발전”으로 화답했다. 이에 따라 정치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협력과 교류를 적극적으로 실천하기로 합의했다. 그 대표적인 사업이 ‘한일 각료 간담회’. 선언 직후 김 총리가 장관을 대거 대동해 일본 가고시마를, 그 다음 해엔 오부치 총리가 주요 각료와 함께 제주도를 방문했다. ‘간담회’에 걸맞게 의전과 격식은 최소화했다. 그래서 장소는 유명 휴양지, 시간은 주말, ‘드레스 코드’는 캐주얼 복장. 풍광 좋은 곳에서 넥타이를 푼 채 속 깊은 대화를 나누자는 것이었다. 실제 필자를 비롯해 취재기자들은 ‘양국 간 신뢰 형성’을 큰 성과로 보도했다.

뜬금없이 20여 년 전 기억을 소환한 것은 최근 일본의 한국에 대한 경제보복 조치 때문이다.

아베 총리는 지난 7일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 등을 언급하면서 “그들이 말하는 것은 신뢰할 수 없다”고 했다. 박근혜 정부와 체결했던 위안부 합의가 정권교체 후 폐기된 데 이어 청구권 협상으로 끝났다고 생각한 개인 배상 문제까지 들고 나온 한국의 ‘신뢰 위반’에 나름 정당한 조치를 취했다는 것이다. 우리 입장에선 말도 안 되는 억지다. 무엇보다 정치 문제를 우월적 경제 지위를 악용해 풀려는 태도에서 과거 ‘제국주의 망령’을 보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당장 일본 상품 불매운동, 일본 여행 취소에다 일본 출신 아이돌 가수 비난까지 ‘일본 때리기’가 봇물처럼 쏟아질 기세다. 속은 시원할망정 결코 옳은 대처법은 아니다. 치졸한 상대에겐 오히려 더욱 대범하게 대응해야 한다. WTO(세계무역기구) 제소도, 유엔 등 국제기구와 공동조사도 좋다. 미국의 중재도 적극적으로 동원해야 한다. 일본에 의존해온 부품 국산화 등도 필요하다. 하지만 시급한 것은 일본 핵심과의 직접 대화다. 대일특사도 보내고 핫라인도 구축하고, 필요하면 정상 간 담판도 해야 한다. ‘굴욕외교’라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구더기 무섭다고 장을 안 담글 순 없지 않은가. 글로벌 분업 구조상 당장 우리가 큰 손실을 당하는 상황이다. 일본에게 화해의 손짓을 먼저 내밀었던 김대중 대통령은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강경대응은 또 다른 강경책을 불러왔다. 외교 채널은 끊겨 버렸고, 정부 간 신뢰는 완전히 무너졌다. 이는 두 나라 모두에 불행한 일이었다’. 당시 한일 공동선언을 채택하면서 김 대통령은 일본이 끊임없이 요구해온 대중문화 시장을 과감히 열었다. 많은 우려와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나 결과는 일본을 강타한 한류다. 그런 바탕 위에 오늘의 BTS(방탄소년단) 열풍이 있다. “응답하라, 1998!” 21세기 새로운 관계를 모색했던 한일 양국 지도자의 담대한 용기와 도전이 지금 다시 절실해지고 있다.

부산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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