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나 기업 같은 조직이 특정 혹은 불특정 공중과 소통하는 방법을 학문으로 정리한 PR학에는 ‘컨틴전시(contingency) 이론’이라는 게 있다. 우리말로 굳이 풀면 ‘정황적 수용 이론’쯤 된다. 이 이론의 모토가 ‘그때 그때 달라요(It depends)’이다. 조직 내·외부에 위기가 발생하면 미리 정해진 매뉴얼에만 의존할 게 아니라 해당 상황에 최적화된 개별 대처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천재지변 무역전쟁 등 비상사태가 생길 때마다 허둥지둥하는 관료 사회를 보며 매뉴얼 부재를 질타하기는 쉽다. 그러나 매뉴얼의 존재 자체가 복잡다단한 위기상황에서 대응력을 떨어뜨리고 오히려 담당자에겐 책임 회피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지적도 일리가 있다. 그래서 극단적으로는 “매뉴얼을 없애라”는 말도 한다.
비스마르크와 함께 근세 독일 통일의 1등 공신으로 꼽히는 헬무트 폰 몰트케 원수는 “적이 쳐들어올 것으로 예상되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적은 네번째 방법으로 들어온다”고 했다. 또 “어떤 작전 계획도 적과 마주치는 순간 휴지조각이 된다”고도 했다. 실전에는 변수가 많아 미리 세워둔 계획은 무용지물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으로, 요즘도 경영학에서 많이 인용된다. 하버드 비즈니스스쿨에서는 여러 비상상황을 설정하고 해결책을 내놓도록 하는 컨틴전시 게임을 경영자 위기관리 교육의 하나로 채택하고 있다.
최근 일본 출장에서 돌아온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이 긴급 사장단 회의를 소집해 ‘컨틴전시 플랜’의 마련을 주문했다. 말 그대로 위기대응에 필요한 비상경영계획이다. 지난 4일 일본이 3가지 반도체 핵심 소재의 한국 수출 규제를 개시하자 출장길에 올라 5박6일간의 일정을 마치고 귀국한 이 부회장이 내놓은 일성이다. 홍남기 경제부총리도 지난주 경제장관회의에서 대외여건 악화에 의한 시장 변동성에 대비해 컨틴전시 플랜에 따라 대응하겠다고 말했다. 과거사 문제에서 비롯된 한국과 일본의 경제전쟁이 전례없는 강도로 이어지는데 대한 위기감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사실 우리 정부 입장에선 대일 외교에 사용해온 어떤 매뉴얼도 지금은 먹히지 않는 상황이다. 그러나 위안부 합의 파기, 강제징용 배상 판결 등으로 일본이 경제보복 조치를 취할 가능성이 높다는 경고는 진작부터 있었다는 점에서 뒤늦은 정부 대응에 아쉬움은 남는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게 최상이듯 컨틴전시 플랜을 애초 가동할 필요가 없도록 하는 게 최선이란 건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강필희 논설위원 flut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