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4일, 무려 80일간이나 공전하던 국회를 정상화하기로 여야 원내대표들이 마침내 합의했다. 여당과 여론의 엄청난 비판에도 꿈쩍 않던 자유한국당이 합의문에 전격 서명했으니, 그 내용에 관심이 쏠린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합의문을 들여다보니 다소 의외였다. 국회 파행의 빌미가 된 패스트트랙 법안들은 합의정신에 따라 처리하기로 했다. 그리고 추경은 우선 심사하며, 한국당의 막판 요구조건이던 경제청문회는 ‘원탁토론회’ 형식으로 더 협의하기로 한다는 게 골자다. 한국당으로서는 똑 부러지게 얻어낸 게 없는 결과였다. 이러려고 국회 밖을 그토록 오래 떠돌았나 싶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여야 합의는 단 두 시간만에 없던 일이 됐다. 여당에 밀려 실익이 없는 합의문이라며 한국당 의원총회에서 부결된 것이다. 기껏 합의해 놓은 걸 뒤집는 데 대한 비판이 충분히 예상됨에도 그럴 만했다. 여론에 떼밀려 백기 투항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어서다. 나경원 원내대표의 지도력에 흠집이 간 것은 물론이다. 여당 협상 파트너였던 이인영 원내대표가 “재협상은 꿈도 꾸지 말라”고 발끈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이 원내대표의 큰 소리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불과 나흘 뒤 여야 3당 원내대표 합의로 국회가 진짜 정상화한 것이다. 합의 내용은 앞서보다 한결 진전됐다. 패스트트랙 법안을 다루는 정치개혁특위와 사법개혁특위 활동 기간을 두 달 늘리고, 특히 민주당과 정의당이 맡고 있던 두 특위 위원장 자리 중 하나를 한국당에 내주기로 한 게 골자다. 갈등의 핵심인 두 특위 위원장 중 한 곳을 꿰차게 됐으니 한국당으로선 이전보다 꽤 괜찮은 협상 결과다. 비록 비난은 받았지만 앞서 의원총회의 부결이 결과적으로 옳은 선택이었던 셈이다.
그러니 이번엔 비난의 화살이 이 원내대표를 향했다. 그로선 하염없이 늦어진 추경 통과와 민생 법안 처리가 화급한 발등의 불이었을 법하다. 하지만 합의문엔 한국당이 추경이나 민생법안 처리에 협조한다는 내용은 없었다. 거기에다 정개특위 위원장이었던 심상정 정의당 의원을 ‘강제 해임’하는 무리수까지 두며 두 특위 위원장 중 하나를 한국당에 내줬다. 앞선 합의와는 완전히 뒤바뀐 결과다. 아무리 국회 정상화가 급했다고는 해도 줄 것만 주고 별 소득도 없는 합의란 비판이 나올 만했다.
한 번 뒤틀린 합의 결과는 또 다른 고민으로 이어졌다. 정개특위와 사개특위 중 어느 위원장을 한국당에 내줘야 하는가 하는 딜레마다. 선거제 개혁과 사법개혁은 민주당에게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사안이다. 그런 만큼 한국당에 어느 쪽을 내주든 해당 특위는 상당 부분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그 고민은 2주 넘게 이어졌다. 당내에서도 의견은 갈렸다. 민주당 지도부는 정개특위를 선택하기로 입장을 굳혔다지만 일부 의원은 사개특위를 선호한다. 선거제 개혁의 취지야 옳지만 자신들의 밥그릇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주당 지도부가 어떤 선택을 하든, 이런 고민 자체가 선거제 개혁에 대한 의지를 의심받기에 충분하다. 무엇보다 딜레마가 예상되는 데도 한국당에 위원장 자리 하나를 내주기로 한 합의가 애당초 문제였다. 선거제 개혁의 명분에는 동의하면서도 실제는 그리 달갑지 않다는 속내가 반영된 게 아니냐는 얘기다. 게다가 선거제 개혁은 한국당이 결사 반대할 뿐 아니라 여당 일부 의원도 여기 동조하고 있어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다. 이런 민감한 사안을 협상의 한 조건으로 내걸었으니 여당이 선거제 개혁을 제대로 이뤄낼지 의심받는 것이다.
특히 두 거대 양당은 선거제 개혁과 관련해 암묵적으로 소극적 행보를 보인 전력도 있다. 지난 지방선거 이전 기초의원 4인 선거구를 신설하거나 늘리려는 시·도 선거구획정위원회안이 상당수 광역의회에서 부결된 일이다. 소수 정당의 기초의회 진출을 늘리려는 선거제 개편 취지를 거스르는 양당 소속 광역의원들의 이런 행태를 당 지도부는 수수방관했다. 전형적인 기득권 챙기기다. 이번 선거제 개혁은 기초의회가 아니라 국회의원 자신들 문제인 만큼 더더욱 양당의 이해관계가 부합할 수 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선거구제를 바꾸는 것이 권력을 한 번 잡는 것보다 훨씬 큰 정치 발전을 가져온다고 믿는다’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뜻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지역구도 타파와 우리 정치 발전을 위한 선거제 개혁이 우여곡절 끝에 패스트트랙에 올려져 대수술을 앞둔 마당이다. 사법개혁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이번 기회를 놓치면 선거제 개혁을 기약하기는 힘들다. 총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시급한 국회 정상화를 고려하다보니 민주당의 스텝이 다소 꼬이긴 했다. 하지만 이제라도 좌고우면 없이 책임 있게 선거제 개혁을 마무리 해야 옳다.
논설실장 jjk@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