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기의 유명한 서화가 무호(無號) 이한복(李漢福, 1897~1944)은 일찍이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예술 세계에 깊이 감복하였다. 그는 김정희의 ‘법고창신(法古創新)’ 정신을 흠모하여, 늘 옛것을 연구하여 자신이 추구한 미술 세계의 자양분으로 삼았다. 중국 오창석(吳昌碩, 1844~1927)의 글씨를 모범으로 삼아 글씨를 쓰는 한편 김정희의 ‘추사체’ 본질에 대해 연구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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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기 유명 서화가 이한복이 추사의 작품을 임모한 ‘계산무진’. |
이한복은 김정희의 글씨를 자주 임모(글씨나 그림 따위를 본을 보고 그대로 옮겨 쓰거나 그리는 것)하였는데, 그중 제일 유명한 것이 ‘계산무진(谿山無盡)’이다.
‘계산무진’은 김정희의 글씨뿐만 아니라 한국 서예사 전체에서도 단독 작품으로는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어 오던 것이다. 이한복의 매서운 손길은 김정희의 원본 글씨의 필력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완벽하게 임모해 내었다. 이렇게 쓸 수 있었던 것은 김정희의 예술 정신을 그만큼 진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근래 이한복이 그렇게 흠모하였던 ‘계산무진’이 진위 논란에 휩싸여 문화재청의 보물 지정에서도 제외돼 논란이 되고 있다. 한 미술사학자가 위작이라는 의견을 낸 것이 논란의 불씨가 되었다. 그는 진위에 대한 뚜렷한 감식안과 과학적 근거보다는 보면 안다는 식의 신령적인 사고로 많은 이를 의아하게 만들었다.
지난달 18일부터 중국 베이징에서는 ‘추사 김정희와 청조 문인의 대화’라는 제목의 전시가 열리고 있다. 이 전시에는 그동안 진위에 논란이 있었던 김정희의 ‘계산무진’과 ‘명선(茗禪)’을 포함한 많은 작품이 출품되었다. 이 전시가 진행되자 또다시 ‘계산무진’과 ‘명선’ 두 작품에 대한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진위가 불분명한 작품이 출품되어 국가적 망신을 사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위작이 대형 전시장이나 국제 전시장에 등장하면 진품으로 간주되곤 하는데, 전형적인 미술품 세탁 방법이다”며 범죄 행위처럼 지적하기까지 한다.
한국과 중국 문화계의 자존심이 걸린 큰 전시에 이러한 진위 논란이 끼어드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더욱이 이들은 분명한 근거 없이 일부 학자의 비논리적인 주장에 부화뇌동하며 문제를 지적하여 사태를 악화시키고 있다. 이들은 정작 위작이 분명한 다른 작품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한국의 감정 전문가들 중에는 실제 위작을 구분할 줄 모르면서, 유명한 작품에 시비를 걸어 이름을 내려는 사람이 많다. 이러한 이를 감정 전문가라 할 수 없다. 또한 저명한 학자의 말만 앞세워 보도하는 언론의 무책임한 행동도 사라져야 할 것이다.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