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의 이상에 공감하면서도 그 비용을 현실적으로 따져보는 현실주의, 해방의 명분 뒤에 숨어 있는 사익의 준동을 경계하고 공동체의 규범적 통합을 중시하는 공동체주의, 어떤 물질적 도덕적 성과도 수단과 과정을 정당화할 수 없다고 믿는 원칙론, 항상 권리 주장에 앞서 자기 의무를 돌아보는 의무론’. 정치학자인 연세대 김성호 교수는 보수주의의 특성을 이같이 규정했다. 공익을 앞세우고 정의를 추구하되 가치의 실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는 정치관이니, 이를 ‘합리적 보수주의’라고 해도 손색이 없겠다. 김 교수는 이 기준에 견주어 보면 우리나라에는 진정한 보수가 없다고 했다.
합리적 보수주의자가 드문 건 사실이지만, 아예 없지는 않다. 지난 16일 별세한 정두언(61) 전 의원이 그 한 사람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전 의원의 총선 불출마를 요구하는 ‘55인 파동’을 주도하고 권력 사유화를 비판하다 정권의 미움을 사 사찰을 당하고 법정구속되는 곤욕을 치른 게 고인의 그런 면모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이력이다. 그는 20대 총선에서 낙선한 뒤에도 쓴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보수·진보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옳고 그름을 가리는 데 초점을 맞춘 그의 정치비평은 합리적 보수주의자로서의 명성을 높였다.
그중에서도 윤석열 신임 검찰총장과 관련한 마지막 정치비평이 특히 눈길을 끈다. 고인은 “문재인 대통령이 윤석열 검사장을 검찰총장에 임명한 건 대단한 용기”라고 했다. 윤 총장은 원칙주의자여서 그 칼날이 여야와 보수·진보를 가리지 않고 날아들 수 있고, 문 대통령도 그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이 말에선 윤 총장에 대한 호평 수준을 넘어 정권의 입김에서 벗어나 공명정대한 수사를 해달라는 강한 바람이 읽힌다. “노무현 대통령 때는 셔틀외교까지 할 정도로 일본과 관계가 좋았다”며 문 대통령의 대일 정책을 비판한 대목도 인상적이다.
“보수와 진보를 떠나 합리적인 인식과 판단을 가졌던 분” “대한민국 보수 정치에 큰 족적을 남긴 정치인” “저로 하여금 보수 개혁에 매진할 수 있게 하는 에너자이저였다. 촌철살인, 정곡을 찌르는 비평은 그 자체가 문학이었다.” 고인의 그런 노력은 보수·진보 모두의 칭송으로 돌아왔다. 그 평가들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합리적 보수주의자’다. 이는 합리적 보수를 보기 힘든 척박한 우리 정치토양에 대한 고백이기도 하다. 고인의 죽음이 합리적 보수의 싹을 틔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이경식 논설위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