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정권이 자행한 대(對)한국 ‘무역보복’을 접하며 다시금 아픈 역사를 생각한다. ‘신뢰 손상’ ‘전략물자 북한 유출 가능성’ ‘적절한 물자관리 필요성’ 등 수차례 말을 바꾸며 이유를 들고 있지만 한낱 핑계일 뿐이다. 지난 17일 일본 고위 관리가 “18일까지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 제3국 중재위 제안을 수용하라”고 촉구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역사 문제에서 출발한 정치·외교적 사안 때문에 ‘경제 보복’에 나선 것임을 자인한 꼴이다. 게다가 그 목표가 ‘대한민국 산업의 쌀’로 불리는 반도체이며, 이제 그 ‘목줄’을 조르겠다고 나선 것은 ‘경제 침략’을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1876년 강화도조약, 1905년 을사늑약, 1910년 강제병탄 때처럼 총칼만 안 들었을 뿐, 협박을 일삼는 무도함은 100여 년 전과 빼닮았다.
한일 간 역사를 생각할 때면 필자 고향에 있는 원폭피해자복지회관과 연로하신 피폭자들이 떠오른다. 어린 시절 식민지 조국에서 살지 못하고 강제징용된 부모를 따라 일본 어딘가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평생 고통 속에 살아야 했다. 그래서 드는 확신이다.
“지금은 일본 국민들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때이다.”
우선 간단한 질문부터 던져보자. 핵폭탄의 가공할 위력을 실제 경험한 유일한 나라는 어디일까? 그렇다. 일본이다. 태평양전쟁 막바지인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서 미군 B-29 폭격기로부터 투하된 원자폭탄, 일명 ‘리틀 보이’가 폭발했다. 3일 후에는 나가사키에서 두 번째 원자폭탄, 일명 ‘펫맨’이 터졌다. 어떤 기록에는 사망자와 피폭자를 합쳐 70만 명(그중 10%는 한국인)이라고 했고, 어떤 기록에는 사망자만 27만 명, 후유증으로 고통받는 피폭자는 30만 명이 넘는다고 했다. 존재해서는 안될 ‘악마의 무기’라고 불리는 핵폭탄의 사용 사례는 이때가 유일하다. 그 결과로 ‘전범국가’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특이한 것은 당시 원자탄 희생자에 대한 국제적인 추모나 안타까움의 표현들을 찾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측은지심이 들 만도 한데 오히려 아시아와 남·서태평양 일대 모든 국가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드디어 아시아 태평양에서 수천만 명을 죽음으로 내몬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했다. 만세! 해방이다.” 죽음도 억울한데 일말의 동정조차 받지 못했으니, 선량한 일본 국민들의 불행은 참으로 원통할 수밖에 없다.
대다수 일본인은 선량하다. 평화를 사랑하고 예의 바르며 신사적이고 기술력도 높다. 그래서 현대 세계인들은 일본이라는 브랜드를 신뢰한다. 문제는 정치를 업으로 삼은 위정자들이다. 원자폭탄도 결국 1860년대 메이지유신 이후 정한론(征韓論)에서 출발한 위정자들의 그릇된 패권적 야욕이 불러온 ‘자살골’이었음을 역사가 증명한다. 그리고 청일전쟁, 러일전쟁, 한반도 침략, 만주 침략, 중일전쟁, 동남아시아 침략, 태평양전쟁에 이르기까지 70년간 지속된 일제의 세계 침탈 및 전쟁 행위의 첫 번째 희생양은 한반도였다.
최근 자민당 내 극우 정치인의 결합체인 아베 정권의 움직임에서 다시 그 같은 악몽의 그림자가 감지된다. 그러나 시대는 변했다. 한국의 반도체는 국내를 넘어 ‘세계 산업의 쌀’이 된 지 오래다. 메모리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공급량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한국 공장이 멈추면 세계 경제가 멈춘다. 아베 정권은 이번에도 한창 평화 분위기가 조성되는 한반도를 들쑤시고 불쏘시개 삼아 전 세계를 향한 ‘불장난’에 나서려 하고 있다. ‘전범 국가’의 멍에도 모자라서 이제 ‘경제 전범’이 되려고 한다. 한국은 다시 뭉치고 있다. 어제 정부와 여야 정치권 대표가 만나 외세 침탈에 대한 국가적 위기 상황에 함께 대처키로 뜻을 모았다. 국민들은 자발적으로 일본 제품 안 사고 안 팔기, 일본 여행 안 가기에 나섰다. 미국 중국 등 G2를 비롯한 전 세계가 아베 정권에 수차례 경고음을 날리고 있다. 특히 미국의 대외 경제 전문가들은 이번 조치로 아베 정권이 그동안 일본이 쌓아온 신뢰도를 손상하고 자체 외교를 저해하는 한편 세계 무역질서를 깨트리려 함으로써 스스로 고립·위축되는 ‘자책골’을 먹기 일보 전에 처했다고 보고 있다.
폭주하는 아베 정권을 멈출 수 있는 주체는 한국 미국 중국 사람들이 아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일본 국민, 당신들이다. 과거 제국주의 시대에는 ‘대동아공영권’이라는 기치 아래 ‘황국신민’으로서 영문도 모른 채 일방적 복종과 희생을 강요당했지만, 지금은 선택권이 있다. 민주시민의 특권인 주권 행사를 통해 바로잡을 수 있다. 2016년 대한민국 국민은 무혈 촛불혁명으로 그릇된 정권을 교체했다. 모레, 21일은 일본의 참의원 선거일이다. 현명한 일본 국민들에 의한 ‘재패니즈 촛불혁명’이 필요한 때다. 한국을 위해서가 아니다. 일본 국민, 바로 여러분의 또 다른 불행을 막기 위한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편집부국장 bungs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