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갑오개혁 때, 일본에 간 첫 관비 유학생 중 10명 정도가 경제 관련 공부를 했다. 유교 집안의 자제가 당시 상업을 천시하는 조선의 풍토 속에서 경제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려운 여건 아래 경제학을 접한 이들은 조선에 바뀐 세상을 하루빨리 알려야겠다는 사명감이 컸다.
신해영은 1907~08년 관비 유학생 원응상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경제학 교과서를 편찬했다. 그런데 그는 경제 교과서를 내놓기 전인 1906년 ‘윤리학 교과서’를 먼저 펴냈다. 왜 경제학자가 윤리학 교과서를 썼을까?
그의 ‘윤리학 교과서’는 4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권은 지·덕·체 등 자기 수양, 제2권은 부모 형제 등 가족관계와 친구 간 예절, 제3권은 사회윤리, 제4권은 국민의 의무, 애국, 국제관계 의무 등 국가 문제를 다루고 있다. 얼핏 보면 다른 수신 교과서들과 비슷한 것 같지만, 그의 책은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제3권 사회윤리에서 재산권과 소유권을 다루고 있다. 그는 사람의 신체와 생명이 소중하듯이 타인의 재산 또한 중요시 여겨야 한다고 했다. 재산은 그 사람이 부지런히 노력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자기의 재산을 소유할 권리가 미약하다면 누구도 열심히 일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또 재산의 사용 수익 처분을 자유롭게 하는 소유권이 확립되어야 한다. 국가나 개인이 남의 재산권이나 소유권에 멋대로 손댈 수 있다면 백성은 열심히 일하고 저축할 마음을 잃고 사회는 게으름과 빈곤에 빠질 것이다. 재산권과 소유권의 확실한 보호를 위해 이 권리들은 법규뿐만 아니라 마땅히 지켜야 할 행동준칙인 도덕으로 확립되어야 한다.
그는 공산주의를 경계하라는 내용도 덧붙였다. ‘세상에 혹 공산주의를 앞장서 외치면서 재산의 사유함을 공격하고 논박하는 자가 있으며 또 부의 불평등함을 비난하는 자가 있으니, 이런 무리의 말이나 글은 모두 잘못된 견해와 망상에서 나오는 것인데 어찌 충분히 분변하여 밝힐 필요가 있겠는가. 따라서 우리는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하여 나의 소유권을 존중히 함을 희망하는 것과 같이, 우리도 또한 다른 사람에 대하여 그 소유권을 침해함이 옳지 않으니, 이것이 곧 재산에 대한 우리의 의무이다’.
그 밖에 제1장 ‘자제’ 항목에서 욕망의 절제는 필요하지만 욕망 자체를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고 기술했다. 이것은 성리학의 가르침과 다른 입장이다. 그는 명예를 바라고 재산을 욕구하고 쾌락을 구하려는 생각이 없다면 행복의 대부분을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했다. 다만 정도를 초과해서 욕망의 노예가 되는 것은 경계하라고 했다. 부를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욕망 중 하나이다. 그는 ‘재산을 만들어서 이것을 증식하는 것은 인생의 필요한 의무’라고 지적했다. 단지 재산을 증식하되 너무 인색하지도 사치하지도 말라고 권했다.
조선에 근대 경제학이 자리 잡으려면 우선 부에 대한 긍정적 인식과 재산권·소유권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경제는 재산권·소유권의 보호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타인에 대한 재산권·소유권의 존중이 경제생활과 경제발전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우치기 위해 이런 내용을 ‘윤리학 교과서’에 집어넣은 것이다.
1865년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난 신해영은 갑오개혁 때 첫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의 게이오의숙에서 4년간 경제학을 공부했다. 귀국 후 그는 개화기 대한제국의 관료로서 중추원 의관, 예식원 참리관, 탁지부 참서관을 거쳐 1906년 학부 편집국장까지 올랐다. 그는 교육자로서도 맹활약했다. 광흥학교와 한성법학교 등에서 경제학을 가르쳤고, 1905년에는 보성전문학교의 초대 교장을 맡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1909년 여름 학부 편집국장으로 유학생 감독을 위해 도쿄로 가던 중, 관부연락선에서 괴질로 사망했다. 그는 유학생들에게 ‘정성을 모아 노력하고 의지와 기개를 분발하여 업을 이룬 후 다른 날에 이미 잃은 국권을 광복하게 하면 나는 저승에 있어서도 춤을 추면서 치하하겠다’는 유언을 남긴 채 생을 마감했다. 그의 ‘윤리학 교과서’는 얼마 후 검열제도가 시행되면서 금지도서가 되어버렸다.
연세대 동서문제연구원 객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