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평화’ 시대는 벌써 끝난 것일까?

최근 이란이 미국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페르시아만에서 소동을 일으키고 있다. 러시아는 미군이 떠난 시리아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굳히고 있으며, 중국은 남중국해를 지배하려는 시도와 함께 미국과 정면으로 무역전쟁을 벌이고 있다. 마치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질서가 전면적인 공격에 직면한 것처럼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정부는 군사 대결을 회피하거나 외국에 주둔하는 미군을 철수시키는 대신 상업적인 이익을 취득하는 데 급급하고 있어서, 미국이 세계의 경찰로 군림하던 시대가 이렇게 짧게 끝나는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비슷한 상황이 고대 서아시아 앗슈르 제국에도 일어났다. 앗슈르는 기원전 9세기부터 7세기 말까지 막강한 군사력을 앞세워서 서아시아지역은 물론 이집트까지 지배하는 제국을 건설하는데, 바벨 지역을 효과적으로 관리하지 못해 결국 패망에 이르게 된다. 특히 앗슈르의 정복왕 씬-악후-에리바(기원전 704~681년)는 자신의 조부 시절부터 바벨을 우대하며 직할 지역으로 다스리던 체제를 폐지하고 바벨 출신인을 분봉왕으로 임명하며 속국으로 지위를 낮추었다(기원전 703년). 그러나 이웃 나라 엘람의 지지를 받은 반대세력이 그 왕을 폐위시키고 반란을 일으키자, 군대를 이끌고 바벨을 재점령하고 앗슈르 궁전에 데려다 어릴 때부터 교육을 시킨 다른 바벨 사람을 분봉왕으로 임명한다(기원전 700년).

그러자 이번에는 그 왕이 배신하고 반란을 일으켰고, 앗슈르 왕은 다시 바벨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자신의 아들인 앗슈르의 황태자를 왕좌에 앉히고 돌아왔다. 이번에는 바벨이 안정을 찾는 것 같았고, 앗슈르 왕은 바벨지역 최남단 늪지대 원정에 나섰다(기원전 694년). 그러나 원정 도중 엘람이 바벨을 공격했고 앗슈르 왕자를 엘람으로 잡아가 버렸다. 앗슈르 왕은 급히 군대를 돌려 엘람으로 향했으나, 바벨 왕좌는 반앗슈르 전선의 지도자에게 넘어간 상황이었다(693년). 사태는 쉽게 해결되지 않았고 심지어 바벨과 엘람 동맹군은 앗슈르 군대에 대항하여 전투에서 승리하는 등(기원전 691년) 큰 위기로 번지게 되었다. 아들을 잃고 정치적 입지까지 좁아지게 된 씬-악후-에리바 왕은 마지막 선택을 하게 되는데, 최강의 앗슈르 군대를 거느리고 진군하여 수도 바벨을 초토화시키고 만다(기원전 689년). 자신이 남긴 기념비 명문은 “유프라테스 강물을 끌어들여 도시 전체를 쓸어버렸다”고 기록했다.

바벨은 남부지역 정치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수백 년 동안 메소포타미아 만신전의 주인이었던 마르둑 신전이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앗슈르 왕이 바벨을 파괴한 것은 엄청난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부담을 무릅쓴 결정이었다. 그렇다면 바벨은 이런 식으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을까? 그렇지 않다. 바로 다음 왕 앗슈르-악후-잇디나(기원전 681~669년)는 자기 부친이 바벨을 파괴한 것이 잘못된 결정이었다고 말하며, 국가 재정으로 바벨을 재건한다. 그리고 훗날 앗슈르 제국은 바벨과 메대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고 만다(기원전 612년).

막강한 군사력으로 영토를 확장하던 앗슈르는 정치적 지위와 경제적 부를 누리게 되었고, 그 힘으로 더 큰 군사력을 키워 아시아를 벗어나 이집트까지 점령했다. 그러나 전쟁에서 승리할 수는 있었지만 점령한 영토를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는 없었다. 정복한 지역 사람을 모두 살해하거나 타 지역으로 이주시킬 수 없는 상황에서 직접 왕위를 맡아서 통치해 보고, 왕자를 보내서 간접적으로 통치해 보고, 본봉왕을 임명해서 속국으로 다스려 보고, 동원 가능한 모든 방법을 썼는데도, 지나치게 확대시킨 전선을 효율적으로 지배하지 못한 결과 국가의 명을 다하게 된 것이다.

앗슈르 제국의 예에 비추어 보면 미국 정부는 매우 현명한 선택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유럽이나 서아시아에서 몸을 빼고 러시아에게 운신할 수 있는 틈을 내주고 그 대신 동아시아에서 다양한 협상과 외교를 통해 중국을 견제하는 데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미국이 중동평화정책을 발표한 바레인 콘퍼런스는 실용적인 대안이 없는 선언에 그친 반면, 오사카에서 열린 G20 회의와 남북미정상회담은 중국과의 관계를 막다른 골목으로 끌고 가지 않으려고 한 걸음 양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미국이 목표로 삼은 세계 질서는 미국의 경제적 이익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대등한 반대세력을 다양한 외교적 방편으로 견제하는 대신 지나친 투자로 이어질 수 있는 지역의 국지전에 개입을 최소화해야 안정적으로 유지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분간 유럽과 서아시아는 지역 맹주들이 활개를 치는 혼란스러운 상황이 지속될 것이며,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는 힘 겨루기하는 강대국들 사이에서 완충지대로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건국대학교 중동연구소 전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