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대(對)한국 경제보복이 시작되면서 친일·반일이 정치권의 핫 이슈로 급부상했다. 일본이 반도체 관련 독과점 첨단소재에 대한 수출 규제라는 도발을 감행한 이후 우리 정치권에서는 엉뚱하게도 ‘친일’ 논쟁으로 내부 총질이 시작됐다. 본질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났다. 머리를 맞대고 일본의 도발에 대한 대책을 논의해도 해결책을 찾아내기 힘든 마당에 본말이 전도된 논쟁으로 날을 지새고 있다. 이러니 일본이 우리를 얕잡아보는 것이다.
한국당이 일본의 수출규제에 대응하기 위한 예산을 포함시킨 추경안을 반대하고, 외교적인 해법마련을 주문하자 여권은 돌연 ‘친일 프레임’을 들고 나오면서 정국주도권을 장악했다. 방어에 급급해진 한국당은 즉시 ‘일본 팔이’라면서 맞대응했지만, 이미 프레임의 덫에 빠져버렸다. 한일 ‘경제전쟁’은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기승전총선’ 모드로 들어간 민주당은 모르긴 해도 내년 총선까지 친일프레임으로 한국당을 옭아매려고 할 것이고, 한국당은 프레임에서 탈피하기 위해 전력질주할 것으로 보인다. ‘친일 딱지’는 한국정치판에서 치명적이다. 실제로 친일공방이 달아오른 지난주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은 8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고, 민주당의 지지율도 동반상승했다. 반면 한국당의 지지율은 일부 조사에서는 5개월만에 최저치로 떨어졌다.
걱정되는 것은 ‘친일 딱지붙이기’가 내년 총선까지 이슈가 되면 일본의 경제보복에도 내부갈등은 더욱 심화될 것이고, 국론을 총집결한 외부대응은 불가능해질 것이라는 점이다. 또 다른 문제는 이번 친일·반일 논란의 선봉에 청와대 민정수석이 선봉장으로 나섰다는 점이다. 조국 수석은 여권 내에서도 인정하는 문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차기 법무부장관에 사실상 낙점된 상태다. 그런 조 수석이 이번 사태 발생후 페이스북에 올린 글들을 보면 대부분 감정적이고 선동적이다. 1980년대 운동권 노래 ‘죽창가’로 포문을 열었다. 죽창을 들고 일본에 본때를 보여주자는 식으로 비쳐졌다. 며칠 후에는 ‘전쟁’이라는 단어를 거침없이 사용하면서, “이러한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진보’냐 ‘보수’냐, ‘좌’냐 ‘우’냐가 아니라, ‘애국’이냐 ‘이적(利敵)’이냐이다”고 적었다. “한국 대법원 판결에 대해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마땅히 ‘친일파’라고 불러야 한다”고 말했다. “지레 겁먹고 쫄지 말자. 싸워야 하고, 또 이겨야 한다. 국민적 지지가 필요하다”고도 했다. “닥치고 믿어라. 안 믿으면 친일파이고, 이적행위자다”는 이분법적 잣대를 들이댄 것이다. 선동이자 국민 편가르기이다.
이 중 대부분은 일본이 아니라 내부, 그러니까 야권을 겨냥한 글들이다. 보수진영을 겨냥한 동어반복적 페북질은 “거짓도 천 번 말하면 진실이 된다”던 괴벨스를 연상케 한다. 정부정책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영문도 모르고 친일파가 됐다. 우리 국민 어느 누가 일본 행태에 분노하지 않을까. 일본 경제보복에 동의하는 한국사람이 누가 있겠나.
청와대 수석의 SNS 정치는 대통령 참모로서의 역할이 아니다. 조 수석은 정작 본연의 임무인 인사검증은 낙제점을 받았다. 장관급 인사 16명이나 국회로부터 인사청문보고서를 받지 못하고 임명을 강행해야 하는 부담을 대통령에게 안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한마디의 사과도 하지 않았다. 역대 이런 민정수석은 없었다.
청와대는 국내건 대외건 갈등조정의 최후보루다. 청와대와 참모들은 ‘죽창’을 들고 최전선에 나설 것이 아니라 일본의 숨통을 죌 비책을 세우고 실행방안을 마련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DJ)은 생전에 “서생적 문제의식을 갖되, 상인의 현실감각을 가져라”고 했다.
또 다른 문제는 집권여당이 말 한마디 못 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진데 민주당 의원들이라고 모두가 조 수석의 SNS 정치에 불만이 없었을까. 민주당 윤호중 사무총장이 얼핏 조 수석의 페이스북 정치가 부적절하다고 지적하는 듯했으나 하루 만에 “조 수석과 나는 생각이 다르지 않다”고 항복했다. 조 수석의 시각이나 발언에 문 대통령의 암묵적 지지가 있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리라는 점을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래서 문 대통령이 혹시 대의정치가 아닌 직접민주주의 구현을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생긴다. 문 대통령이 취임 100일을 즈음한 국민인수위 대국민 보고회에서 “국민들은 간접민주주의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직접민주주의를 요구하고 있다. 국민의 집단지성과 함께 가겠다”고 말했던 점이 뒤늦게 생각난다. 플라톤이 저서 ‘국가’에서 대중을 이용한 정치적 선동과 혼란이 거듭되면서 급기야 반대자들을 모두 넘어뜨리고 지배권 일체를 거머쥐게 되는 ‘참주정 국가’를 정의로운 국가의 타락과정 가운데 최종단계로 경계했던 부분도 떠오른다.
서울본부장·서울정치부장 thrkk@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