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을 중심에 놓을 때에야 삶이 원활해진다. 우리 안에는 우리를 이끌고 가는 힘이 있다. 그 힘으로 인해 성취하거나, 혹은 추해진다. 이윤기 작가는 그리스로마신화에서 ‘아무래도 인류의 한 갈래로서의 우리 안으로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강이 흐르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한 바 있다. 신화는 원초적인 것에 닿아 있기에 여전히 막강하다.
돈을 중심에 놓는 삶은 보편적이다. 돈에 대한 이기심은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삶의 형태다. 돈은 불행 아래 더 큰 불행, 더 큰 불행 아래 극심한 불행으로 빠지기 십상인 삶을 방어하는 최고의 수단이다. 권력을 중심에 두는 삶 또한 낯설지 않다. 권력은 현실적으로는, 설득과 협상과 말의 힘을 높이고 다른 필요를 충족시키는 교환가치로서의 힘을 지니고 있다. 심리적으로는 자신감의 원천이다. 인정욕망의 추구도 당연하다. 인정욕망은 생존에 결정적인 요인이었기에 지금 우리에게까지 이토록 강렬하게 남은 것이 아닐까. 톨스토이조차 가장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 허영 즉 인정욕망이라 하지 않았던가. 자랑을 들어줄 사람이 없는 사람만큼 불행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든 사진으로 남으려 한다.
돈과 권력, 인정욕망은 정당하다. 죄가 없다. 오히려 돈과 권력과 인정욕망을 추구하지 않는 삶이 비정상일 것이다. 그러나 돈과 권력과 인정욕망의 성취는 예외적인 경우다. 성취는 여러 조건이 하나의 시공간에서 만나야만 가능하다. 그러기에 제갈공명은 일을 도모하는 것은 사람이지만, 성취시키는 것은 하늘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실패와 좌절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시간을 견뎌야 하는 사람의 고통은 특별한 것이다.
실패와 좌절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서 우리를 움직이는 힘은 작동을 멈추지 않는다. 다리를 절단했음에도 다리의 통증을 여전히 느끼는 것처럼 욕망의 강은 흐름을 멈추지 않는다. 성찰적 이성이 작동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새 낯선 시간, 낯선 곳에서 자신의 얼굴, 젊은 시절 혐오했던 그 얼굴과 마주할 수밖에 없다.
우정을 중심에 가져다 둔 삶을 생각해본다. 괴테가 파우스트에서 말한 삶의 원천으로써의 우정(우리는 삶의 시냇물을 그리워하고/ 아아! 삶의 원천을 그리워하게 되는구나). 나이와 남녀를 경계로 삼지 않는 우정.
우정은 좋은 구조를 만든다. 좋은 의도와 원인은 좋은 구조를 만나야만 좋은 결과로 귀결된다. 불교는 중국으로 들어감으로써, 기독교는 로마제국으로 들어감으로써, 이슬람은 오스만제국으로 들어감으로써 세계 종교가 되었다. 좋은 의도와 원인은 희귀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좋은 의도와 원인은 그것을 받아줄 좋은 구조가 없기에 대부분 흔적 없이 사라진다. 좋은 구조는 도시의 차원으로 확장해 볼 수도 있다. 좋은 구조가 없다면 호혜주의에 입각하고 잘 디자인된 정책이라도 실행되지 못한다. 관행에서 벗어나는 일 혹은 귀찮은 일 정도로 치부될 뿐이다. 쇠퇴에 저항하지 못하는 것은 좋은 구조가 없기 때문이다.
우정은 좋은 사건을 만든다. 인간의 삶에서 의지가 개입하는 부분은 사건의 초기 국면이다. 어느 단계를 넘어서부터는 사건이 삶을 이끈다. 좋은 사건은 좋은 곳으로, 나쁜 사건은 나쁜 곳으로 데려다 놓을 것이다. 우정은 타인의 불행으로부터 행복감을 느끼지 않는다. 우리 안에는 저승을 흐르는 여신 스틱스와 지혜의 신 팔라스 사이에서 태어난 질투의 여신 젤로스(ZEIOS)가 도사리고 있다. 타인의 행복으로부터 불행을, 타인의 불행으로부터 위안과 행복을 얻는다. 우정은 귀가 순해지는 것이다. 비난과 새로운 말에 얼굴을 붉히지 않는다. 우정은 애환을 말하는 것이다. 때로 고약한 일들을 하는 세상을 욕하며 연민을 함께하는 것이다. 우정은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주고받는 대화다. 우정은 소통이라는 거짓 개념을 쫓아가지 않는다. 상호 침투한다. 우정 어린 대화는 말이 독점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우정은 잔을 부딪치고, 깔깔거리고, 쑥덕쑥덕하고, 눈감아 주는 것이다. 우리 부산과 부산 사람에게 원래 깃들어 있는 것, 삶의 원천, 우정을 중심에 놓은 삶은, 근사하다. 지역적이면서 세계적이다.
작가·칼럼니스트·도서출판 함향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