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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 칼럼] 조선시대 ‘북캉스’ 풍경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9-08-08 19:46:34
  •  |   본지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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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폭염과 열대야가 이어지고 있다. 시원한 계곡과 수평선이 걸려 있는 해변마다 사람으로 붐빈다. 둥글게 휜 해안선과 하얀 모래사장, 파라솔이 있는 풍경은 우리가 한여름 속에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 멀리서 파도가 밀려와 부서지는 소리와 포말은 쾌감을 더해준다.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는 시 ‘바닷물의 발라드’에서 해변의 풍경을 ‘바다가/ 미소 짓는다, 멀리서./ 거품의 치아, 하늘의 입술’이라고 멋지게 노래했다. 바닷물이 해안에 닿아 흩어지는 모습을 웃는 표정에 빗댔다. 그늘에서 수박을 나눠먹는 가족의 풍경도 정겹다. 매미를 잡으러 나무 아래로 몰려다니거나 맑은 시내에서 물놀이를 즐기는 아이들의 모습은 천진하기만 하다. 나는 여름날 대낮에 목물을 하던 일이나 여름날 밤에 평상에 가만히 누워 더위를 식히던 일을 이 여름에는 떠올리게 된다.
그림 서상균
내게도 기억에 남은 몇몇 여름휴가가 있었다. 강원도 월정사에서 상원사까지 이어지는 한적한 흙길을 굵은 여름 비를 맞아가며 걷던 일이나, 주문진 모래사장에 단 둘이 앉아 산처럼 쌓인 얘기를 밤새 나누다 문득 맞았던 푸른 새벽이나, 조개 등을 캐 와서 저녁밥을 해 먹던 서해 바닷가의 민박집은 아직 기억에 생생하다. 초등학교 친구들과 함께했던 지리산에서의 산행은 매우 고되었지만 청춘의 일기로 기록되어 있다. 물론 시골집에서 보냈던 여름휴가는 더욱 많았다. 자두와 포도를 따거나, 일이 없는 날 오후에 냇가에 가서 다슬기를 잡던 일도 시골집에서 보낸 휴가의 일과였다.

취향과 형편에 따라 휴가를 달리 즐기겠지만 우리는 휴가를 통해 경험의 목록을 새로이 추가하기도 하고, 또 자신에게 보다 큰 자유를 주기도 한다. 적극적으로 세상과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큰 계획 없이 느슨한 여유를 즐기기도 한다. 어떻게 보내든 휴가는 우리에게 맑은 공기와도 같은 신선함을 선물하는 특별한 시간이다.

그런데 요즘에 여름휴가로 북캉스를 즐기는 사람이 조금씩 늘고 있는 것 같다. 북캉스는 ‘북(book)’과 ‘바캉스(vacance)’의 결합어인데, 책을 읽으면서 휴가를 보내는 것을 뜻한다. 이달 들어 서울의 한강 교각 아래에서 12만 권의 헌책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헌책방을 열고 있다는 소식이 있고, 또 전국의 여러 도서관에서는 북캉스 주간을 잡아 도서관 개방 시간을 심야까지 늦춘다는 소식도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은 휴가철 읽기에 읽기 좋은 책 100권을 최근 발표했다. 언론은 작가와 독서 애호가들의 추천을 받아 휴양지를 갈 때 갖고 가 읽기 좋은 책을 앞다퉈 소개하고 있다. 소설집이나 산문집, 시집 등의 책을 읽으며 휴가를 보내는 일이 점차 일반화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조선 시대에 있었던 ‘독서당(讀書堂)’에 관한 기록은 꽤 흥미롭다. 젊은 문신들에게 특별히 긴 휴가를 줘서 실컷 책을 읽게 했는데, 그 집이 독서당이었다. 중종 때에는 지금의 서울 옥수동 동호(東湖) 부근에 독서당을 두었다고 한다. 사림에서도 책 읽기에 알맞은 곳에 정자 등의 공간을 마련하여 독서당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이 모두가 책 읽는 일의 즐거움과 이익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정조 때 규장각의 검서관(檢書官)을 지낸 이덕무는 책을 읽으면서 네 가지의 이익이 있음을 알게 됐다고 했다. 배가 고플 때 읽으면 배고픔을 잊게 되고, 조금 추울 때 읽으면 기운이 읽는 소리를 따라 흘러 들어와 추위를 잊게 되고, 근심이 있을 때에 읽으면 근심이 스러져 없어지고, 기침을 앓을 때 읽으면 기침이 그친다고 했다. 또 퇴계 이황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자제들에게 “다른 사람에게 빌린 책들의 목록을 작성해서 빠짐없이 돌려주도록 하라”고 간곡하게 당부했다. 이들 또한 책 읽기의 즐거움과 이익을 잘 알았다고 하겠다.

나는 휴가를 갈 때마다 책을 들고 간다. 신간으로 나온 시집이나 소설집, 예전에 읽었으나 다시 읽고 싶은 고전, 혹은 헌책방에서 우연히 구매한 책 등을 가방에 넣어서 간다. 그리고 여행지에 도착해서 한 편 한 편의 시와 문장들을 펼쳐 읽고 천천히 음미한다.

‘한 파도보다 완전한 몸체,/ 해안선을 씻는 소금,/ 그리고 빛나는 새가/ 땅에 뿌리박지 않은 채 날아간다’라는 파블로 네루다의 시 ‘대양’을 읽은 것은 강원도 강릉의 한 바닷가에서였다. ‘그는 멕시코 만류에서 조그만 돛단배로 혼자 고기잡이를 하는 노인이었다. 팔십사일 동안 그는 바다에 나가서 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았다. 처음 사십일 동안은 한 소년이 그와 함께 나갔다. 하지만 사십일이 지나도록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자 소년의 부모는 노인이 이젠 정말이지 돌이킬 수 없이 ‘살라오’, 즉 운수가 완전히 바닥난 지경이 되었다고 소년에게 말했다’로 시작되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책 ‘노인과 바다’를 읽은 것은 시골집의 감나무 그늘에서였다.

사실 한 권의 책이 그 책을 읽는 사람에게 즉각적으로 어떤 급격한 변화를 주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그렇지만 책을 읽은 전후에는 분명 미세한 이동이 있다. 읽는 사람의 생각과 감정에 움직임이 있게 된다. 나는 그 움직임의 긍정적인 역할을 유연함으로의 느린 이동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나와 다른 것과의 접촉은 혼자만 높고 귀한 자아를 반성적으로 돌아보게 한다. 자신과 다른 것과의 서로 다름을 흔쾌히 인정하게 해서 완고한 자아를 버리게 한다. 그리하여 다른 것을 수용하게 한다.

여행지에 많은 책을 가져가려는 생각을 접고, 휴가 기간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책을 읽겠다는 의욕도 좀 접고, 다만 한두 권의 책에게 자기 휴가의 일부를 내어주겠다는 생각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다 읽지 못하면 책갈피를 꽂아두어도 좋을 것이다. 휴가를 떠나기 전에 마음의 허기를 달랠 한 권의 책을 미리 골라놓으면 어떨까 한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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