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중미에 거주하는 지인과 통화를 했다. 꽤 오랜만이었다. 국내 대기업의 해외 지사장이 그의 직함이다. 외국에 나간 지 제법 됐길래 향수병에 걸릴 때도 되지 않았냐는 농담을 던졌다. 지인은 이를 수긍했다. 언제까지 외국에서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 임기를 연장할지를 고려하는 중이라 했다. 근데 불쑥 몇 마디를 덧붙였다. 지금 한국이 처한 모양새를 보면 귀국하고픈 마음이 쑥 들어간다고. 그 지역의 다른 한국 회사 지사장들도 비슷한 말을 많이 한단다.
뭐가 그리 불만이냐고 물어봤다. 갑자기 그가 목소리를 높였다. 요즈음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동네북’이 된 것 같아 너무 창피스럽단다. 나름 수출역군이자 민간외교관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지만 상황이 이러니 외국인들과 상담을 할 때도 신경이 쓰인다고 했다. 그는 지난 대선 때 더불어민주당 후보에 표를 던졌던 것으로 알고 있다. 평소 열렬 민주당 지지자는 아니었지만 고민 끝에 선택한 정부가 기대 이하의 행보를 보이자 실망감이 더 컸던 모양이다.
특정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개인의 자유. 그런 까닭에 딱히 이 지인의 말에 의미를 둘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그의 역정에 수긍이 되는 부분도 있었다. 요즘 돌아가는 판을 보노라면 개인적으로도 화가 치밀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던 까닭이다. 외부로부터 많은 도전이 쏟아져 나오지만 우리 정부가 이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고 있어서다.
우리나라의 목줄을 죄려는 일본의 경제보복은 현재진행형이다. 한국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방침을 밝힘에 따라 사태 해결의 조짐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북한은 잊을 만하면 마구잡이로 미사일을 쏘아 올린다. 그러면서 입에 담기조차 힘든 말들로 우리 정부에게 조롱까지 해댄다. 여기에다 러시아 항공기마저 우리 영공을 버젓이 드나든다.
한국과 혈맹이라는 미국은 한 술 더 뜬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를 별일 아니라고 두둔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김정은에게서 받은 친서를 흔들며 우리를 소외시킨 채 북미회담을 추진하겠다는 의중까지 내비친다. 이 와중에 한국으로부터 방위비를 받아내는 게 아파트 월세 수금보다 더 쉬웠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황당무계한 발언까지 더해지면 정신이 혼미스러워진다. 우리나라가 어쩌다가 이런 신세가 됐는지 자괴감이 들 정도다.
누군가는 지금의 형국을 조선 말기에 비유하기도 한다. 열강의 야욕에 하릴없이 끌려다니던 유약한 조선 왕조가 처한 현실과 비슷하다는 이야기다. 물론 당시와 지금을 직접 비유한다는 것은 무리다. 풍자가 지나쳤다. 현 정부를 흠집내기 위한 정치 공세의 일부분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아주 틀린 말은 아닐 수도 있다는 게 조금 찜찜하다.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당연히 정부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먼저 나서서 갈래를 치고 대응책을 마련한 뒤 국민에게 지지를 부탁해야 한다. 그런데 현 정부는 이게 부족하다. 북한의 도발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긴장 고조보다는 한반도 평화정착이 우선돼야 한다는 명제를 부인하지 않지만 말 같지도 않은 언사로 점철된 북한의 모욕을 감내하는 정부 태도는 지켜보기가 안타깝다.
일본의 경제보복에 대처하는 자세도 그다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 일본에 절대 질 수 없다는 결기를 내비치나 장기간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두 나라 간 마찰에서 승리를 이끌어 낼 ‘한 수’를 숨기고 있는지 의심스럽기만 하다. 그것 없이 국민의 반일정서 촉구만으로는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정부도 잘 알고 있을 터다.
시정잡배끼리의 다툼에서도 한쪽이 틈을 보이면 순식간에 승패가 기울어진다. 하물며 국제관계에서는 자국 이익에 관해서라면 조그마한 배려도 기대하기 어렵다. 미국이든 일본이든 북한이든 자신한테 손해가 된다면 한 걸음도 양보하지 않는 게 당연지사다. 명분에 얽매이다가는 ‘달아나는 노루 쳐다보다 잡은 토끼도 놓치는 꼴’이 되기 딱 알맞다.
지금은 유례를 찾아 보기 힘든 위기가 한반도를 둘러싼 시기다. 앞뒤 거리를 잴 만한 여유가 없다. 무조건 이겨내야 하는 게 지상과제다. 북한 도발이나 일본의 공세가 내년 총선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를 계산하는 정신 나간 짓은 그만 둬야 한다. 외부의 압력에 주위 눈치를 보다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는 정부라면 함량미달이다. ‘그래, 한번 쳐봐라. 그러면 너는 오히려 완전히 죽는다’라는 배짱조차 없으면 냉혹한 국제세계에서 살아남을 방법이 없다.
정부는 굳건히 중심을 잡아라. 그리고 함께 가야할 길을 가리켜라. 그러면 국민은 따라간다. 지지 정당이 다른 것은 문제가 안 된다. 어떤 내부 갈등이 있더라도 외환이 닥치면 그것부터 막아내야 한다는 게 국민 정서다. 지금 전국 각지에서 벌어지는 일본 제품 불매운동만 하더라도 진보와 보수가 따로 존재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정부도 이제는 남다른 강단을 보일 때가 되지 않았는가.
논설위원 haorem@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