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에서 물건 하나 살 때도 일부러 원산지를 찾아보게 된다. 데상트 로고가 박힌 티셔츠를 입고 외출했다가 종일 사람들의 눈치를 봐야 했다. 일본제품 불매운동이 쉬 사그라들 것 같지 않다. 한국인의 냄비근성을 얘기하던 일본 극우세력에 한 방 먹인 듯해 속 시원하다.
일본과의 관계가 역대 최악이다. 경제전쟁을 치르고 있다. 중재를 기대했던 미국은 강 건너 불구경이다. ‘다른 나라 지키려고 돈 내주는 데 지쳤다’며 방위비를 더 내라는 트럼프는 얄밉기 짝이 없다. 상황이 이런데 북한은 도와주진 못할망정 연방 미사일을 쏘아 올리고 긴장을 극대화한다. “삶은 소대가리가 앙천대소할 노릇”이라는 등의 막말을 듣고 있자니 판문점 도보다리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정담을 나누던 그 김정은이 맞나 싶다.
돌이켜보면 역대 정권 중에서 일본과 관계가 가장 좋았던 건 김대중(DJ) 정부 시절이었다.
박정희 전두환 등 군사정권은 경제에 초점을 맞춰 일본에 손을 내밀었다. 우리가 아쉬운 게 많아서일까 관계가 썩 나쁘지는 않았다. 그러다 문민정부를 표방한 김영삼(YS) 정권 들어서 한일관계는 악화 일로를 걸었다. 하시모토 총리가 집권하면서 일본은 과거사 사과에 딴지를 걸기 시작했고, 화가 난 YS는 대일 강경정책을 펼쳤다. 대통령의 입에서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는 험한 말까지 나왔다. 일본도 가만히 있진 않았다. IMF사태가 터지고 정권이 바뀌는 어수선한 틈을 타 한일어업협정 파기를 통보하며 양국은 극한 대치로 치달았다. 그래도 지금처럼 경제전쟁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김대중 정부는 다른 정권과는 달리 철저하게 ‘실리주의’에 입각해 한일관계를 풀었다. IMF 외환위기 탈출을 위해서 경제 대국 일본과의 협력 강화가 절실하기도 했다. 이때 나온 것이 ‘김대중-오부치 선언’이다. DJ는 당시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와 ‘21세기 한일 공동 파트너십’을 선언했다. 일본은 식민 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죄의 입장을 밝혔고, 우리 정부는 화해와 용서로 호응했다. 국내 반대 여론을 무릅쓰고 일본문화를 개방한 것도 그때다.
물론 그 시절 오부치 정부와 지금의 아베 정부는 결이 완전히 다르다. 오부치는 비교적 온건하고 합리적이었다. 반면 아베는 군국주의 ‘대일본’을 다시 꿈꾼다. 전쟁 가능한 나라로 개헌하고 군사 대국화를 추진하는 게 다 그런 이유다. 그러기 위해 그동안 북한 위협론을 펼쳤다. 북한 같은 극악무도한 집단이 위협하기 때문에 무장해야 한다는 논리다. 근데 한반도에 평화 무드가 조성되자 이제 한민족 위협론을 내세운다. ‘한국에서 전략물자가 북한으로 건너가고 있다’는 식이다. 문제는 갈수록 우경화하는 일본에서 이런 논리가 먹힌다는 것이다.
다행히 마냥 강 대 강으로 치달을 것 같던 한일 대치상황이 지난주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조금은 누그러진 듯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일본에 유화 메시지를 던졌고 일본 반응도 썩 나쁘지는 않다. 이번 주에는 양국 외교장관 회담도 예정돼 있다.
막무가내 일본이지만 우리는 대화에 나서야 한다. 여당도 친일이냐 반일이냐 양단간에 택일하라는 식의 친일 프레임을 걸어서는 안 된다. 일본에 날을 세워 인기를 조금 더 얻을 수는 있겠지만 국익에 도움이 되지는 않을 터다. 불매운동이 오래 지속되는 상황은 바람직하지 않다. 감정만으로 대응하기엔 한일관계가 너무나 복잡다단하게 얽혀 있다.
또 몇몇 지자체가 나서 ‘NO재팬’을 부추기고 관공서에서 쓰던 일제를 한데 모아 불태우는 장면은 볼썽사납다. 정치인들이 반일감정을 선동해서도 안 된다. SNS에 릴레이로 펼쳐지는 일본경제침략 대책 챌린지도 ‘애국자 코스프레’ 쇼인 것 같아 마뜩잖다. 극일도 좋고 경제독립도 좋지만 이런 식은 안 된다. 일본 관광지가 텅 비어서 그쪽 주민들 걱정이 많다는 뉴스를 보며 만족해하는 건 일시적인 국뽕일 뿐이다. 우리가 맞서야 하는 건 아베의 군국주의다. 일본이 아니다. “NO아베”이지 “NO재팬”이 아니다.
지금 경제 관련 부처에서 일본 경제보복 대책을 쏟아내고 있다. 그만큼 우리가 급하다는 방증이다. 한일 간 경제 분업체계가 깨지면 일본도 손해를 보겠지만 아무래도 우리 쪽 손해가 좀 더 크다. 중요한 건 경제전쟁이 양국 모두에 상처만 남는 치킨게임이라는 거다. 모두에게 손해가 되는 이런 상황은 빨리 끝내야 한다.
어제가 DJ의 10주기였다. 어려울 때 보여준 그의 리더십을 그리워하는 이가 많다. 어려운 상황에 부닥친 이 정권도 명분과 실리를 잘 따져보길 바란다. 일본에 큰소리치는 건 쉽다. 하지만 그건 갑갑한 상황에서 사이다 한 잔 마시는 것에 불과하다. DJ의 실리주의가 절실한 때다.
디지털미디어국장 doll@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