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차림이나 특정 색깔이 이념이나 주장을 상징하는 수단이 된 지는 오래됐다. 1960년대 유럽 학생운동을 주도한 좌익 계열은 장발에 긴 수염을 기르고 청바지와 후드티를 유니폼 삼았다. 이에 질새라 우파 학생들은 양끝이 올라가도록 깔끔하게 콧수염을 말아올리고 청바지에 가죽점퍼를 입었다. 면도한 얼굴로 양복바지에 스웨터를 걸치면 중도나 무당파란 뜻인데 좌우 양쪽으로부터 ‘기회주의’로 몰려 동네북 신세가 되곤 했다.
‘검은셔츠단’은 이탈리아 파시스트당을 이끌었던 무솔리니의 사병 조직 이름이다. 독일 나치스의 친위대도 ‘검은 군단’으로 불렸다. 그러나 사실 검은색은 파시스트와는 반대편 극단에 있던 아나키즘(무정부주의)의 상징색이다. 인류의 화합을 가로막고 대립을 조장하는 모든 것에 대한 거부를 뜻한다.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박열 선생이 활동했던 단체가 ‘흑도회’와 ‘흑우회’다. 불의에 대한 강한 저항의 뜻도 있다. 2년 전 훈센 독재에 반대한 캄보디아 시위대나 낙태금지법에 저항한 폴란드 시위대 역시 까만 옷을 입은 ‘검은 시위대’로 기억된다.
범죄자뿐 아니라 반체제인사의 중국 인도를 가능케 하는 ‘송환법’에 반대한 대규모 홍콩 반정부 시위가 두 달 넘게 이어지고 있다. 중국 공안의 공권력 개입이 임박한 것으로 전해졌던 지난 주말 11번째 집회는 다행히 별 탈없이 마무리됐다. 이번 홍콩 시위대의 상징도 검은색이다. 지난 6월 집회 도중 사망한 남성을 애도하려고 참가자들이 검은색 옷을 입은 게 시작이다. 5년 전 행정장관 완전직선제 요구 시위에서 최루액을 막고자 펼쳤던 우산과 최근 경찰 총에 맞아 한쪽눈을 다친 여성을 연상시키는 안대도 같이 등장한다. 반면 이들을 진압하는 경찰은 흰색 셔츠와 흰색 손목밴드 차림이다. 곤봉 등으로 시민을 마구 때려 ‘백색 테러단’이란 별칭이 붙었다. 지금 홍콩에선 아이러니하게도 검은색이 정의, 흰색은 폭력을 상징한다. 하기야 미국 백인우월주의단체 KKK단의 고깔 복면도 흰색이 아니던가.
중국 지도부는 “범죄인 인도법 사건은 색깔 혁명의 특징을 분명하게 보이고 있다”며 “홍콩 사태가 더 악화되면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2014년 홍콩의 우산 혁명은 사실상 실패로 끝났다. 이번 검은 시위만큼은 그루지야의 장미 혁명, 우크라이나의 오렌지 혁명, 키르기스탄의 레몬 혁명, 카자흐스탄의 튤립 혁명처럼 성공한 색깔 혁명의 대를 이을지 지켜볼 일이다.
강필희 논설위원 flut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