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 세상을 뜬 부모가 김성우(金聲遇)에게 물려준 것은 가난이었다. 젊은 시절 궁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허덕이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데, 누가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 장사를 해보라고 권한다. 큰돈이야 어렵겠지만 소소한 돈이야 빌려줄 것이고 또 그것을 여러 사람에게서 빌릴 수 있다면 모아서 장사 밑천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솔깃하여 그렇게 해 보았으나 푼돈이라도 건네는 사람은 백에 한둘도 되지 않았다. 어떻게든 돈을 모아야겠다는 오기로 그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울산에 살고 있던 김성우는 동래로 이사했다. 동래는 왜관을 통해 일본과 무역이 이루어지는, 돈이 흔한 곳이었다. 그가 무역에 뛰어든 것은 물론이다. 푼전도 없던 그가 어떻게 상인이 되었는지, 또 어떤 상품을 어떻게 거래했는지는 알 수는 없으나, 전기(傳記)에 의하면 김성우는 15년 만에 거창한 부를 쌓는다. 돈 한 푼 빌리지 못했던 가난뱅이가 동래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었던 것이다.
집안사람들이 자손을 위해 농토를 사고 집을 짓자고 졸랐다. 부자가 된 사람이 땅을 사 모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법이다.
그러나 김성우의 답은 달랐다. “예전에 내가 남에게 도와달라고 했을 때 아무도 도와주려 들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한이 된 사람이다. 이제 내가 재산을 가지고도 베풀지 않는다면 그건 내 마음을 저버리는 일이지.” 그는 삼시 세 끼와 몸 가릴 옷 한 벌 외에는 자기 몫으로 챙기지 않았다. 땅 한 뼘 일구지 않았고 집 한 칸 짓지 않았다. 집안은 가재도구 하나 없이 휑뎅그렁하였다. 그렇다면 김성우는 자신의 부(富)로 무엇을 했던가?
오직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다급한 처지의 사람을 돕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혼기를 놓친 사람이 있으면 주선해 시집 장가를 보내고, 부모의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사람은 장례를 치르게 해 주었다. 밥 짓는 연기가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는 사람, 양식이 바닥나고 병이 들어 길을 가지 못하는 나그네가 있으면 반드시 도움의 손을 건넸다. 자신과 친하거나 친하지 않거나, 평소 아는 사람이거나 알지 못하는 사람이거나 상관이 없었다. 또 도움을 주었다고 해서 밖으로 드러내는 법도 없었다.
이웃에 가난하지만 성품이 곧고 깨끗하여 남에게 도움을 받은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끼니도 잇지 못하는 그의 형편이 보기 딱했다. 하지만 도와주겠다는 말을 건넬 수는 없었다. 밤에 그의 집을 몰래 찾아가 솥에 돈 5000푼을 넣어 두고 나왔다. 아침에 일어나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진 주인이 동리 이웃에게 물었더니, 모두들 “명서(明瑞, 김성우의 字)가 한 일이겠지” 하였다. 하지만 김성우는 입도 떼지 않았다.
한 번은 병든 왜인(倭人)이 그를 찾아왔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병이 들어 장차 죽게 되었습니다. 그대의 높은 도덕을 듣고 감히 이렇게 찾아왔나이다.” 김성우는 그에게 따로 거처를 마련해 주고 입히고 먹이고 의원을 불러 병을 고치게 하였다. 한 해를 넘겨 병이 나은 왜인은 흐느끼며 고맙다는 말을 하고 떠났다.
수영(水營) 근처에 열다섯 살 어린 소녀가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었다. 소녀는 밥을 빌고 나무를 해다가 불치병에 걸린 어머니를 봉양했다. 그녀의 존재를 알고 김성우가 도움의 손길을 건넨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뿐만 아니라 뒷날 그 소녀를 자신의 며느리로 맞기까지 하였다(조선 시대의 결혼임을 상기하시라!).
김성우가 부(富)를 일구었던 것은 자신이 아니라 오직 남을 돕기 위해서였다. 당연히 그는 뭇사람으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아무도 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았다. 한번은 동래부로부터 억울한 일을 당하자 모든 상인이 철시(撤市)를 하면서까지 그를 응원하였다. 만년에 김성우는 청도(靑道) 대현(大峴)에 집을 지었다. 그곳 사람들은 그를 존경해 ‘김처사’라고 불렀다. 빼어난 학자에게나 주어지는 최고의 존칭을 얻었던 것이다. 사람살이 이것으로 족하지 않은가?
한성운(韓運聖)의 ‘입헌집(立軒集)’에서 ‘동래상인 김성우’ 이야기를 읽었다. 기릴 만한 분이고 게다가 우리 고장 사람이기까지 하여 이렇게 쓴다.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