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주 시인의 ‘신부’라는 시로 이야기를 꺼내고자 한다. 참고서에 있는 해설은 이렇다. ‘이 시는 시집 ‘질마재 신화’의 맨 첫머리에 실린 작품으로, 한국 여인의 매서운 절개를 짧은 이야기체 형식으로 엮어 놓고 있다’.
소설가 길남 씨의 의견은 많이 다르다. 철없는 남편 놈이 쓸데없는 오해를 해가지고 한 여자 인생을 망친, 또는 그러는 걸 잡아채서 오해를 풀 생각도 안 하고 귀신이 될 때까지 기다리고 앉아 있는 갑갑한….
그런데 이 이름 없는 소설가는 갑자기 왜 해묵은 시를 들고 와서 ‘썰’을 푸는 것일까? 그 이유를 설명하자면 며칠 전의 뜨거웠던 여름밤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바야흐로 열대야가 기승을 부리던 며칠 전. 길남 씨와 그 가족은 찜통 속의 순대처럼 땀을 흘리고 있었다. 더는 참지 못한 가족은 과감하게 에어컨을 가동했다. 섭씨 26도의 온도 설정과 선풍기의 바람은 소설가 가족에게 쾌적한 수면시간을 선물했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그것이 그날 밤 불행의 시작이었음을….
새벽 4시 무렵이었다. 길남 씨는 “어허헉!” 하는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깼다. 아이스팩 같이 차디찬 것이 그의 허벅지에 우르르 쏟아졌기 때문이었다.
어메이징한 상황에 동그래진 눈으로 주위를 살피니 침대에서 언제 내려왔는지 딸내미는 길남 씨의 발 냄새를 맡으며 자고 있었고, 아내는 침대 위에서 모로 누워 발을 길남 씨의 배에 걸치고 있다. 그를 덮친 것은 아이의 동화책. 에어컨 바람에 차가워진 비닐 양장의 책이 아내의 아름다운 하이킥으로 길남 씨에게 날아든 모양이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요,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황당한 상황에 길남 씨는 아내를 노려보다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웃음은 곧 애잔한 심정으로 바뀌었고 길남 씨는 “너 같으면 지금 이 상황에 난리가 났었겠지만 나니까 참아준다”라는 낭만적 대사를 중얼거리고는 화장실로 향했다. 몇 걸음 옮겼을까? 길남 씨는 또 한 번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방바닥에 굴러다니던 안마봉을 밟고는 휘청거리다 애 장난감까지 밟았던 것이다. 허리 삐끗과 발바닥의 고통을 동시에 느낀 그는 “에이씨!”라는 단말마를 뱉고 말았다. 그때 조용히 들려오는 원망의 목소리. “자다가 실수할 수도 있지, 이젠 잠도 편하게 못 자게 하나?”
남편이 미웠으리라, 소설가랍시고 문학이 어쩌고 하며 아내를 경제 전선으로 밀어 넣은 남편 주제에…. 잠마저 제대로 자지 못하게 하니 얼마나 밉살스럽겠는가? 지금 생각해보면 다시 한번 참는 게 맞았다. 하지만 당시의 길남 씨는 아내의 말에 격분하여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짓을 저지른다.
“너한테 욕한 거 아니다! 아니라고!”
“그럼 누구한테 그런 건데? 자다가 지금 뭐 하는 거고?”
“미치겠네, 잠은 먼저 누가 깨웠냐고요!”
오해는 오해를 낳고 이 말 저 말이 섞이면서 두 사람은 악마의 현신을 서로 지켜보며 전투를 벌이고 말았다. 전투는 동이 틀 무렵 끝났다. 거실에서 분을 삭이지 못하고 씩씩대던 길남 씨를 아내가 한 수 접어주고 자리에 눕혔던 것이다.
“아침에 출근 안 할 거가? 1시간이라도 자라.”
길남 씨는 마음을 추스르고 자리에 누웠다. 결국 제자리로 돌아와 누울 것을…. 새벽의 2시간 동안 그는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었던 걸까? 아아, 가혹한 운명의 장난이여. 이해라고는 조금도 없었던 오해의 전투…. 길남 씨는 마트 출근 시간을 1시간 앞두고 피곤한 눈을 감고는 서정주의 ‘신부’를 떠올렸다. ‘저 못된 신랑 놈과 나는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아무리 자다가 스리 콤보를 당했다 한들, 처음 발휘했던 이해심을 왜 더 키우지 못했던 것일까’.
길남 씨는 그날의 교훈을 잊지 않으려 한다. 운명이란 놈이 아무리 가혹하다 해도 그것에 휘둘리던지, 그것을 다른 것으로 바꿀 것인지는 결국 자신의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을….
자다가 봉창을 두드렸더라도 그나마 깨달음을 얻었으니 소설가 길남 씨에게는 아주 유익한 사건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