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선에 포로가 된 우리나라 사람을 찾아내어 생환하게 하는 것은 왜적의 목을 베는 것과 다름이 없으므로 왜선을 불사를 때에는 각별히 찾아서 구해내고 함부로 죽이지 마라’. ‘잘 보살펴서 편안히 있게 하였다가 사변이 평정된 뒤에 고향으로 돌려보내도록 하라’.
1592년 6월 2차 출진한 당포해전에서 승리한 뒤 이순신 장군이 장계에 기록한 내용이다. 나라의 근간이 백성이며, 애민(愛民) 리더십이 구국의 원천이었음을 말해 준다.
국운은 백성의 기운이며, 국가의 기운은 애민을 바탕으로 함께 모아져야 한다. 누구든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힘을 가져야 한다. 국가의 힘은 군사력과 경제력, 외교 전략이다. 결국 예나 지금이나 기술패권 시대이며, 기술 지배력의 강도와 속도가 힘을 좌우한다.
조선산업계에 한중일 조선소의 대규모 합병으로 지각변동이 오고 있다.
중국의 1, 2위 조선사인 중국선박공업(CSSC)과 중국선박중공업(CSIC)의 합병이 현실화됐고, 일본은 이미 오랜 세월을 거쳐 JMU, 미쓰비시중공업과 이마바리조선소 등의 합병을 추진했다. 국내에서는 세계 1, 2위의 현대중공업그룹과 대우조선해양의 인수합병이 진행 중이다.
합종연횡의 대규모 구조조정 속에 조선시장의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 결국 기술패권을 장악하는 쪽이 승자가 될 것이다. 기술의 원천인 사람이 중심이 되고, 사람을 제대로 챙기는 쪽이 이긴다.
경쟁력의 핵심인 노사 양립의 경영, 기업의 지속 성장과 구성원의 인간적인 삶은 양립될 수 없는 것일까?
이 숙제를 우리의 현실에 맞추어 지혜롭게 풀지 못하면 기술패권 경쟁의 낙오자가 되고 만다. 자본 기술 노동집약의 총화인 조선산업의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세계 1등을 유지하고 계승하려면 인식의 전환과 냉엄한 현실의 수용을 통해 노사 공히 파격의 신바람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50년 전 전태일 열사가 작성했던 ‘모범업체 사업계획서’를 보자. 제품 전략, 생산성 향상 방안, 합당한 임금의 책정과 근로시간 등 고용과 노동의 상생 방안, 교육 계획, 사회적 책임이 망라되어 있으며, 창업 자금 마련을 위해 안구 기증까지 제안하는 희생과 지극함 속에서 일할 맛, 살 맛 나는 ‘공동체로서의 모범업체’에 대한 열망과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목적인 사람’과 ‘수단인 자본’의 화해이며, 진정한 이해와 실천이다.
노동에서는 손익의 숫자와 구성원의 기량, 생산성에 앞서 자율과 창의,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존재 가치가 선행되어야 한다. 사용자는 애민 리더십으로 존재론적 만인평등과 일의 가치 즉 기능론적 차이를 조화롭게 조정하고, 이를 직접 보여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
노동계가 전태일 열사로부터 받은 메시지는 수단인 자본이 목적인 사람을 넘볼 때 생기는 폐해에 맞서고, 문제 해결에 나서 달라는 것이다.
자신을 향한 감시와 비판과 견제의 규칙을 세워 본연의 사명을 구현하고, 노조 지도부와 노조원은 하방 연대 의식으로 나눔을 실천해야 한다. 노사의 화해와 협동은 조선산업 지속 성장의 필수 전제이며 근간이다.
조선업계는 장기간 경기침체 여파로 험난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 대형 조선 3사의 올해 상반기 실적도 저조하며, 중형 조선소들은 구조조정 속에서도 간간이 수주 소식이 들리지만 회생을 위한 일감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미중 무역분쟁, 글로벌 경기 둔화, 유가 하락세, 2020년 황산화물 규제에 따른 관망세, 중국과 일본의 동반 견제, 조선용 후판 가격 인상 기조 등 각종 악재가 도사린 상황에서 세계 조선소들의 합병을 통한 대규모 구조조정 소식은 앞날을 가늠하기 힘들게 한다.
이러한 가운데 카타르 LNG선 40척, 러시아 아크틱(ARCTIC) LNG-2 개발 사업의 쇄빙 LNG선 15척, 모잠비크 LNG선 15척 발주 계획은 조선업계에 큰 희망과 기대를 갖게 한다. LNG 연료 추진 대형 유조선, 초대형 컨테이너선의 발주 가능성도 한몫을 더하고 있다.
바야흐로 위협과 기회의 혼돈 속에서 조선산업의 새로운 격동기가 다가왔다. 둔전 개간, 어업과 염전 등으로 군량미를 확보하고, 군수물자 생산, 전선 건조, 무기 제조뿐만 아니라 우수 인재 확보와 무능하고 부정한 인사 축출, 독자적 상벌체제 등을 시행하여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강력한 힘과 튼튼한 인프라를 육·해상에 갖추었던 이순신 장군의 ‘수국’은 애민이 기초된 해양강국의 생태계 구축이었다. 다가오는 조선산업의 새로운 격동기에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하게 해준다.
전 대우조선해양 부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