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은 기회를 먹고 자란다. 기회의 씨앗이 뿌려지지 않은 땅에는 불모의 절망만 가득하다. 지난달 31일 청년 노동자단체 ‘청년 전태일’이 서울 종로구 마이크임팩트에서 개최한 대담회가 그랬다.
“생활 때문에 대학을 포기하고 19세부터 일하다 동료가 죽는 것을 보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과 부자 부모를 만나 엘리트 인생을 사는 사람이 어떻게 출발점이 같은가?” 2016년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 승강장에서 혼자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열차에 치어 숨진 김모 군의 동료 정주영(24) 씨는 절규하듯 물었다.
“동생 일을 겪으면서 대한민국 정부는 어디 한 곳 내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아 너무나 참담했다. 제발 청년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달라.” 지난 4월 경기도 수원의 한 공사장에서 일하다 추락해 숨진 김태규 씨의 누나 김도현(30) 씨는 눈물로 호소했다. 주최 측이 던진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딸과 우리 청년들의 출발선이 같은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들이다.
행사 참가자들은 조 후보자의 딸에게서 ‘기회의 불평등’을 절감했다. 고교 시절의 2주 인턴만으로 병리학 논문의 제1 저자가 되어 명문대와 의학전문대학원에 진학하고, 유급에도 불구하고 1200만 원의 장학금을 받았으니 어찌 그러지 않겠는가.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잡을 수 없는 출발선에 분노한다”고 외치는 그들의 목소리는 처절했다.
‘청년 전태일’ 대담회 같은 결핍의 현장은 한국 사회의 실상을 비추는 거울이다. ‘기회는 평등하게, 과정은 공정하게, 결과는 정의롭게’. 정부의 국정목표는 그 거울로 들여다봐야 비로소 현실성을 가질 수 있다. 현실성 획득의 동력은 바른 정치다. 그 정치는 기회의 평등과 희망에 대한 기대를 키운다.
하지만 최근 그 기대가 흔들리는 일이 생겼다. 여권 일각에서 조 후보자 딸의 입시·장학금 특혜 의혹에 대한 대학생들의 촛불집회를 정파적 행동으로 몰아가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다. 노무현재단 유시민 이사장이 지난달 29일 서울대생들의 촛불집회을 두고 “자유한국당 패거리의 손길이 어른거린다”고 깎아내린 게 그것이다.
‘기회 평등’ 등을 국정목표로 설정할 정도로 현실의 결핍을 심각하게 여기면서도, 조 후보자 딸을 통해 문제를 다시 인식한 대학생들의 개혁 요구는 정치적 색안경을 끼고 보니 이율배반이 아닐 수 없다. 조 후보자의 법무부 장관 적격 여부에 대한 여야의 논란이 격화되는 상황인 만큼, 유 이사장의 지적처럼 한국당 인사의 집회 참가 시도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빈부 격차와 부·권력 대물림의 확대로 기회의 불평등이 심해지는 현실과 아무 상관이 없다. 문제의 본질을 도외시한 채 정파적 시각으로만 보려는 건 기회의 불평등에 좌절하는 대학생들을 두 번 울리는 일이다. 더불어민주당 박용진 의원이 “유 이사장의 발언은 도와주려는 의도는 알겠지만, 진짜 한 번에 검찰·언론·대학생을 다 등 돌리게 만든다”고 비판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여권의 이율배반은 이뿐 아니다. 조 후보자 일가에 대한 검찰 수사에 파상 공세를 퍼붓는 것도 앞뒤가 안 맞기는 매한가지다. 민주당 이해찬 대표는 검찰 수사를 “나라를 어지럽히는 행위”라고 했다. “관계기관에 협의하지 않고 한 압수수색은 전례 없는 행위”라고도 했다. 윤석열 검찰총장의 임명 당시 “역대 누구보다 검찰총장으로 적합한 후보자” “국민과 함께하는 검찰로 거듭나게 할 적임자”라고 적극 옹호한 것과 딴판이다. 특히 관계기관과의 협의를 요구한 것은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훼손하는 행위가 될 수 있는 만큼 보통 문제가 아니다.
11건의 고소·고발이 들어온 데다, 사안마다 의혹이 증폭되는 상황이어서 신속한 수사는 불가피했다. 법원이 검찰에 압수수색영장을 발부한 것은 강제수사의 필요성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여권은 검찰의 청문회 전 수사 착수를 조 후보자 낙마 의도가 깔린 정치 개입이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청문회 이후에 수사한다 해도 실기 등 이유로 정치적 고려 의혹을 제기할 가능성은 있다. 그렇다면 검찰이 취할 자세는 하나뿐이다. 법과 원칙에 따라 일하기. 이것이 정치적 중립을 지키는 최선의 방안이다.
“살아 있는 권력, 청와대든 정부든 여당이든 권력형 비리가 있다면 엄정한 자세로 임해달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당부는 이런 요건이 갖춰져야 제대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그러려면 정치권의 협력이 필요하다. 이제 더는 검찰을 흔들지 말고 묵묵히 수사를 지켜보는 게 옳다. 그것이 정치적 중립의 보장이다. 검찰 개혁은 국회 소관이다. 윤 총장도 국회 처분에 따르겠다고 했다. 검찰은 수사, 국회는 입법. 각자 본분을 다하는 게 모두가 승리하는 길이다.
논설위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