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지난달 28일 수출절차 간소화 우대국 명단(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했다. 앞서 같은 달 24일 한국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지소미아) 연장을 거부했다. 한일 갈등이 지속되는 국면에서 여당의 지도부는 ‘의병’ ‘죽창’을 언급하며 항일 이미지를 동원했으며 청와대 전 민정수석은 친일과 반일, 애국과 매국으로 편 가르기를 시도하기도 했다. 아베와 일본 우익이 치졸한 무역보복 조치를 한 것은 한일 관계에서 어떤 변곡점을 그리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정부여당의 대응이 한국의 국가적 위상과 전략적 목표, 국격에 맞는지 의문이다.
세계 경제학계에서 한국은 식민지에서 해방된 국가들 중 가장 모범적인 경제성장 사례로 통한다. 국가의 경제계획과 효율적인 자원 배분, 기업가의 모험적인 투자, 노동자의 장시간 노동과 저축, 엔지니어의 탁월한 역량, 높은 교육열 등이 잘 조화를 이룬 과정이었다. 더불어 미국의 자국 시장 개방을 통한 한국 상품 수입과 안보비용 부담, 일본이 제공한 식민지배의 보상금과 기술 지원도 큰 역할을 했다.
한일 국교 정상화는 동아시아의 공산화를 막으려는 미국의 전략과 맞물려 있었다. 일본이 제공한 총 8억 달러(무상원조 3억 달러, 유상원조 2억 달러, 민간 상업차관 3억 달러)는 1차 경제개발계획을 위해 필요한 4억2600만 달러의 배에 가까웠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필요자금 중 채 30%도 확보하지 못했다. 독립축하금 명목의 이 자금이, 식민지 시대 징용 노동자들을 위한 배상이 아니라 경제발전에 쓰인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가 이를 국가 발전을 위해 쓴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징용 노동자들에 대한 국가와 기업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산업화 과정에서 한국은 일본을 눈부시게 추격했다. 이제 한국의 주력 제조업인 전자, 선박 건조, 자동차, 석유화학 산업은 일본을 앞서거나 격차가 거의 없어졌다. 정밀기계나 화학소재 분야에서도 기술적 격차를 꾸준히 줄여왔다. 한국은 세계 일곱 번째로 인구 5000만 이상, 1인당 GDP 3만 달러에 진입한 국가이다. 심지어 2019년 IMF 경제전망보고서는 2023년 구매력 기준 1인당 GDP에서 한국이 일본을 앞설 것으로 예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기업은 일본 기업으로부터 핵심 부품소재나 공작기계를 수입한다. 반도체 소재 중 일부도 일본으로부터 수입하지만 반도체를 생산하는 자동화된 생산설비에 대한 일본 의존도 역시 매우 높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 부분인 공장자동화 기계의 주요 소재도 마찬가지다. 이는 한국 경제에 대한 일본의 우월성을 나타내는가? 그렇지 않다. 오늘날 세계 무역은 선진국끼리 경쟁한다. 일본이 한국에 지능형 로봇을 수출하면, 한국은 반도체나 자동차 부품을 일본에 수출하는 식이다. 같은 산업의 제품들 간에도 상호 수출하며 경쟁한다. 그 과정에서 한국도 혜택을 보고 일본도 혜택을 본다.
친일파, 매국노가 아니라도 경제성장 과정에서 일본으로부터 받은 종잣돈의 역할이나 일본으로부터 지원받은 기술적 자원들의 가치를 인정할 수 있다.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기술지원을 받아오면서 일본을 추월할 수 있는 능력을 함양한 국가다. 그렇다고 모든 분야에서 일본에 대한 경쟁우위를 지닌 국가도 아니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이 경쟁력을 지닌 분야에 부분적으로 의존하면서 한국은 더 큰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
진정한 극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일본을 더는 지배-피지배 관계로 의식하지 않고 한국이 가야 할 길을 가는 데 있다. 그 와중에 필요하면 일본과 협력하고 때로는 경쟁해야 한다. 일본은 한국이 잘 활용할 국가이지 극복의 대상이 아니다. 여당이 일본의 도발에 대해 “이번에는 결코 지지 않는다”고 한 것은 일본을 이겨야 할 대상으로 여긴다는 증표다. 이는 한국이 아직 일본의 지배를 받을 수 있는 하위 국가라는 의식이 강하게 작용한 결과다. 필자가 일본의 경제 도발에 대해 청와대와 여당이 극일 민족주의를 동원하는 모습이 안타깝게 바라보는 이유다. 우리의 역량을 과소평가하지 말자.
부경대 경제사회연구소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