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그날의 기억이 또렷하다. 부산항 부두에 설치된 높이 80m짜리 골리앗 크레인들이 휴지처럼 구겨져 땅바닥에 폭삭 주저앉은 모습은 자못 충격적이었다. 그 이전의 어떤 재해 때도 그런 광경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태풍 ‘매미’가 휩쓸고 간 2003년 9월 13일의 부산은 곳곳에 널린 파괴의 잔해들로 인해 폭격을 맞은 듯 어수선했다. 부산뿐 아니라 제주, 경남 사천·함안, 대구, 경북 청송·울진 등 태풍 경로와 주변 지역들은 쑥대밭으로 변했다. 131명이 죽거나 다치고, 재산피해액은 4조2225억 원에 달했다. 1904년 기상 관측을 시작한 이래 가장 거센 순간최대풍속으로 기록된 초속 60m의 강풍이 남긴 상처였다.
‘매미’가 이처럼 가공할 만한 위력을 갖게 된 것은 ‘가을’이란 계절적 요인에서 기인한다. 태풍은 해수온도가 높을수록 에너지를 더 많이 공급받아 강하게 발달하는데, 태풍이 발생하는 해역의 해수온도는 9월에 가장 높다. 게다가 9월에 접어들면 북태평양고기압이 수축하면서 태풍이 빠르게 북상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는 데다, 태풍은 내륙에 접근하면서 차가운 기단과 만나 많은 비까지 뿌린다. 가을 태풍, 특히 9월 태풍이 큰 피해를 유발하는 이유다. 849명이 사상한 태풍 ‘사라’(1959년 9월), 246명의 인명피해와 5조1000억 원의 재산피해를 낸 태풍 ‘루사’(2002년 9월)도 ‘매미’와 같은 유형이다.
또 하나의 9월 태풍이 북상 중이다. 7일 한반도에 상륙할 것으로 보이는 태풍 ‘링링(Lingling)’이다. 현재 중형급으로 성장한 ‘링링’은 한반도에 다가갈수록 몸집을 더 불리고, 순간최대풍속도 초속 35~45m로 거세질 전망이다. 이 정도면 나무가 뿌리째 뽑힐 수 있다. 공교롭게도 태풍 ‘사라’나 ‘매미’ 때처럼 추석과 맞물린 시기여서 명절 분위기를 망치는 재해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이다.
‘링링’은 홍콩이 지은 태풍 이름으로, 소녀의 애칭을 의미한다. 그래서인지 앞서 2001·2007·2014년 등 세 차례 이 이름이 붙은 태풍이 발생했지만, 다행히 한국을 비켜갔고 위력도 그리 세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엔 ‘성깔 있는 링링’으로 표변할지도 모르겠다. 태풍은 피해가 막대할 경우, 아시아태풍위원회에서 그 이름을 영구 제명한 뒤 다시 명명한다. ‘매미’도 그런 절차를 거쳐 ‘무지개’로 바뀌었다. ‘링링’은 앳된 그 이름 그대로 남았으면 좋겠다. 하여, 두 손 모아 빈다. “링링아! 화내지 말아다오.”
이경식 논설위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