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반드시 떠나게 되어 있다’.
오디세우스를 읽다가 무릎을 쳤다. 올해는 유난히 이별이 많았다. 나를 떠나간 사람도 있고 내가 마음을 닫은 인연도 있다. 이승을 떠난 사람이야 숙명으로 여기지만 멀어진 인연의 끈은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시리다.
그러나 숱한 만남과 이별로 이루어지는 것이 인생길이 아닌가. 이미 어제의 길은 지났고 오늘은 다시 눈부시게 걸어가야 한다. 그 생각이 나를 이번 여름에 지구 반대편의 땅 포르투갈로 데려다 놓았다.
과연 해양의 나라라고 불릴 만큼 이베리아반도에서 넘어오는 지중해 바람은 거칠었다. 오디세우스가 세웠다는 수도 리스본의 언덕길을 오른다. 노란 전차가 지나간 자리 위에 붉은 제라늄 덤불이 그늘을 만든다. 고풍스러운 골목 벽은 타일 작품인 아줄레주 그림이 즐비하다. 풍랑으로 정박한 오디세우스가 그를 사랑한 오피우사 여왕을 배신하자, 화가 난 여왕이 리스본을 흔들어 일곱 개 언덕으로 갈라놓았다는 전설이 푸른 타일 속에 펼쳐졌다.
후미진 뒷골목 사이로 낡은 선술집들이 붙어 있다. 포르투갈 여행객이라면 한 번쯤 포트와인에 정어리 통조림을 안주 삼아 리스본의 밤을 기다린다. 파두 음악의 매력에 빠지기 위해서다. 카페나 변두리 술집에서는 유명 파두 가수 사진들을 걸어놓고 장사를 한다. 운이 좋으면 여관 창문 너머나 길가에서도 절정으로 치닫는 파두 음악에 취할 수 있다. 스페인에 플라멩코가 있다면 포르투갈에는 파두가 있다. 플라멩코는 비극적인 정열을 격렬한 춤과 함께 나타내지만, 파두에서는 춤을 찾아볼 수 없다. 오직 가슴을 후벼 파는 영혼의 노래만 있을 뿐이다.
파두는 운명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말이다. 국토의 절반을 대서양과 접한 지리적 특성도 파두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 500년간 지배했던 무어인을 내쫓고 한때 대항해시대를 이끈 포르투갈인에게 바다는 동경의 세상이자 정복해야 할 대상이었다.
바다로 떠난 사나이들은 망향가를 불렀고 기다리던 여인들은 그리움을 노래했다. 쓸쓸한 사랑과 고단한 운명과 몸부림치도록 외로운 인생은 모두 파두 가사가 되었다. 그것이 다 운명이라고 믿는 사람들. 그들은 지금도 누구나 파두를 부른다. 어부도, 생선 장수도, 택시 기사도, 요리사도 모두 가수이고 삶의 주인공이다.
땅끝에서 부르는 리스본 파두를 듣는다. 무명의 여가수가 지금은 전설이 되어버린 파두의 여왕 아말리아 호드리게스의 ‘검은 돛배’를 육성으로 부른다. ‘당신이 탄 검은 돛배는 밝은 불빛 속에서 너울거리고, 바닷가 노파들은 당신이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죠’. 귀항선에 꽂힌 검은 돛대에서 이미 여인은 슬픈 소식을 예감한다. 눈을 감은 채 몸을 젖힌 가수의 비장한 표정에 청중은 숨을 죽인다.
파두 가수들은 검은 옷, 검은 망토를 두르고 노래한다. 이백 년 전 파두 가수였던 마리아 세베라를 기리기 위해서다. 집시였던 그녀가 백작과 사랑에 빠졌으나 서민의 음악이었던 파두는 외면당하고 신분의 벽마저 넘지 못한 채 스물여섯 살에 요절하고 만다.
이후 그녀의 명복을 비는 뜻에서 검은 옷은 파두 가수들의 전통 복장이 되었다. 만돌린을 닮은 열두 줄 악기 기타라 반주가 밑바닥에서부터 치오르는 감정을 다독여 준다.
파두의 음이 절정을 향한다. 길게 뽑은 비음과 가성으로 낮게 읊조리다가 전율하듯 극도의 고음으로 부르짖는다. 강렬한 바람처럼 밀려오는 성량이 가슴을 흔든다. 비통하고 애절하며 둔탁하고 거칠다. 마치 헨델의 메시아를 듣는 착각이 인다. 노랫말을 알지 못하더라도 심장을 파고드는 음색에 압도되고 만다. 한과 상처와 사무치는 그리움의 창법. 포르투갈에서는 이것을 사우다지(Saudade)라 부른다. 파두의 생명이다.
노래가 끝났다. 내 여행도 끝이 났다. 이제 발걸음은 어디로 향하는가. 오디세우스가 그토록 힘겹게 보냈던 여행의 목적도 결국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기 위한 것이라는 말을 떠올린다. 이곳 사람들이 파두를 운명으로 받아들이듯이 생의 이별도 숙명으로 안을 수밖에…. 끝은 다시 시작을 의미하는 것….
평론가·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