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병원 ○병동 2인실에는 87세 정모 할아버지와 한 살 많은 부인이 입원해 있다. 두 분 다 알츠하이머병 환자이지만 할아버지가 조금 나은 편이다. 그는 종종 침대에 붙은 작은 식판 위에 바둑판과 ‘힘의 행마’라는 책을 펼쳐 놓고 혼자서 열심히 바둑을 두느라 누가 들어가도 모른다. 이럴 땐 할머니가 오히려 사람을 반긴다. “아이고! 이장님, 오셨능교.” 할머니는 매일 회진시간에 만나는 담당 의사를 먼 옛날 자기가 살던 마을의 이장(里長)쯤으로 안다. 가끔은 저녁을 먹고 가라며 옷자락을 잡기도 한다. 이 즈음 할아버지가 씩 웃으며 돌아본다. 유난히 사이가 좋은 이들을 ‘잉꼬부부’라 부르는 직원도 있다.
현재 우리나라엔 65세 이상의 사람 10명 중 1명 즉 80여만 명이 치매와 싸우고 있다. 1906년 독일 의사 알로이스 알츠하이머에 의해 알려진 알츠하이머병이 노인성치매의 50~70%를 차지한다. 이 질환은 노화과정에서 ‘베타아밀로이드’라는 단백질이 대뇌피질에 쌓이고 ‘타우단백질’이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海馬)에 들러붙어 발생한다고는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대개 기억력과 인지장애가 서서히 진행되어 결국 일상생활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게 된다. 흔히 깜빡깜빡하는 건망증을 치매 증상이 아닌가,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간이정신상태검사(MMSE)를 받아보고 정상이면 안심하기도 한다.
신경숙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는 치매 때문에 집을 나가 돌아오지 못하는 어머니 이야기다. 엄마를 찾으려는 자식들의 안타까운 사연과 엄마와 함께한 지난 세월을 회상하는 내용들로 독자들의 심금을 울린다. 치매 환자를 둔 가정의 어려움을 잘 표현했다. 나에게도 아픈 기억이 있다. 약 50년 전 칠순의 할아버지가 기억력 장애가 심해 당신이 그렇게 아끼던 스무 살의 손자를 알아보지 못하고, 누구냐고 자꾸 물으시는 통에 그만 눈물을 쏟고 말았다. 나도 이제 나이 들어 언젠가 치매가 덜컥 찾아 올 것 같아 두렵다.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 딱히 예방대책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몇 가지 권고 사항이 있다. ①고혈압이나 당뇨병 같은 성인병을 잘 관리한다. ②과음과 흡연을 피한다. ③복용하는 약물은 최소한으로 줄인다. ④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나 취미활동을 계속한다. ⑤책을 읽기나 음악을 듣는 등 정서적 생활을 꾸준히 한다. 이상은 요즘 나를 찾아오는 분들에게나 나 자신에게도 꾸준히 권고하는 말이다. 사실, 말하기는 쉽지만 실천은 어렵다. 치매 초기에는 투약 및 섭생만으로도 이를 극복하는 사람이 있다. 증상이 심해지면 요양보호사의 방문서비스를 받거나 주간보호센터를 찾아야 하고, 더 심해지면 입원시설을 찾아야 하는데, 현재 전국적으로 1400여 개의 요양병원과 3000여 개의 요양원이 있다.
고대 로마인처럼 우리의 기대수명이 40세에 불과하다면 치매환자가 거의 없을 것이다. 치매는 의학이 발달하고 수명이 길어지면서 오히려 늘어난 병이다. 그러니 어떻게 오래 살 것인가 못지않게 어떻게 치매를 예방하고, 이길 것인가도 중요하다. 87세에 사망한 대처 전 영국수상, 93세에 사망한 레이건 전 미국대통령도 말년에 10년간 치매를 앓았다. 대중에게 노출되길 꺼렸던 대처 수상과는 달리, 레이건 대통령은 자기의 병을 국민에게 알리고 부인 낸시 여사가 잘 견뎌주기를 바라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이는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과 그 가족들에게 큰 위로가 됐다. 그는 치매를 이긴 사람이다.
우리의 정 노인도 자신과 부인에게 찾아온 변화에 잘 대처하고 있다. 그는 일찍이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다 한국전쟁이 터져 징집됐다. 처음엔 사병으로 갔다가 보병학교를 졸업하고 장교가 된 그는 소대장, 중대장으로 참전하여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 약 5년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교직에 복직하여 30여 년 일하며 정년을 앞두고는 교장을 지내기도 했다. 이렇게 성실하게 사신 분이 오래전부터 파키슨병과 치매가 있는 부인을 열심히 돌보다, 근년 들어 자신마저 치매를 앓게 되자 스스로 병원을 찾았다.
“우리는 꼭 붙어있어야 한다!”며 부인과 함께 입원한 지 2년이나 됐다. 지난겨울 할머니가 인플루엔자 독감에 걸렸을 때, 두 분을 잠깐 분리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극구 반대하여 도저히 떼 놓을 수가 없었다. 하여 두 분 다 독감으로 크게 고생했다. 다행히 회복되긴 했지만, 인지장애가 점점 심해지는 정 노인이 지금도 전쟁터의 병사가 불침번을 서듯 부인을 꼭꼭 지키고 있다. 할머니도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으면 안절부절못하고 두리번거린다.
어느 햇살 좋은 날, 병원 야외 휴게실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는 두 분을 만났다. 두 손을 마주 잡고는 아무 말이 없다. 그래도 한 권의 책 같은 두 사람의 이야기가 오순도순 길게 이어지는 듯하다. 그들은 치매를 능히 이기고 있다.
수필가·의사·온천사랑의요양병원 병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