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한국 현대사에서 대학교수의 시국선언은 주목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시국선언이 문제 해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변곡점이 된 적은 많았기 때문이다. 여론 향배에 중요한 잣대로 여겨졌다. 여기에는 대학교수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이 크게 작용한 듯하다. 우리 사회의 지향점을 제시하는 비판적인 지식인 집단이라는 인식이 지금도 여전하다. 그래서 대학교수의 시국선언은 국민의 이목이 쏠리고 집권층은 상당한 부담을 느끼고는 한다.
대표적인 대학교수 시국선언으로는 4·19 혁명 직후인 1960년 4월 25일 대학교수 258명이 발표한 게 꼽힌다. 당시 교수들은 이승만 전 대통령에게 부정 선거와 유혈 사태의 책임을 지고 사퇴할 것을 요구했다. 다음 날 이 전 대통령은 하야했다. 대학교수의 시국선언이 잦아진 것은 박정희 정권 때였다. 군사독재정권의 물리적인 폭압에 저항하는 시국선언이 많았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 때에는 시국선언이 급속히 확산됐다. 그만큼 민주화 요구가 거셌던 시절이었다.
사실 군사정권 시절 시국선언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시국선언에 이름 하나 올리는 대가는 혹독했다. 구속 고문 해직 사찰 승진누락 등등. 그렇다고 시국선언이 당장 민주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언론통제가 심해 시국선언 소식을 아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학생들과 재야인사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데 만족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시국선언에 참여하는 교수가 지금처럼 많지 않았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가 잇따랐던 1986, 1987년에도 시국선언 참여 교수는 학교별로 10, 20명 정도였다.
민주화 이후 양상은 많이 달라졌다. 외압이 없어지고 이슈가 다양해졌다. 그러면서 시국선언 횟수도, 참여 교수도 많이 늘어났다. 가장 최근에 발표된 조국 법무부 장관의 교체를 요구하는 시국선언에는 전국 대학교수 3396명이 참여했다고 한다.
하지만 시국선언에 대한 시민 반응은 민주화를 요구하던 때처럼 일관적이지 않다. 찬반 논란이 거세다.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고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탓이다. 이번 조 장관과 관련한 시국선언 때에는 서명 교수에 대한 신상털기 공격이 일부 있었다고 한다. 신뢰도를 떨어뜨리려는 의도인 듯 인터넷 서명에는 ‘모택동’ 등과 같은 가짜 서명이 줄을 이어 선별 작업까지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제 시국선언을 하려면 또 다른 의미의 용기가 필요한 시대가 된 것 같다.
정순백 논설위원 sbjun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