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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말의 완상 시대’를 살아가기 /최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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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9-09-23 19:30:13
  •  |  본지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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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오월이었다. 전화를 한 통 받았다. 귀중한 것이 발견되었다 하니 국사암 주차장에서 만나 불일폭포로 오르자는 것이었다. 폭포로 오르는 내내, 오월 숲의 환상적 자태는 눈에 들지 않고 가슴을 채운 궁금함만 둥실대고 있었다. 불일평전에 다다르니 취재를 마친 방송국 기자들과 마주쳤다. 그 기자들을 만나고서야 그 귀중한 것에 대한 궁금증이 풀렸다. ‘완폭대’. 1618년 조위한의 유두류록에 언급된 후 사라졌다는 그 완폭대. 고운 선생의 친필을 확인한다니 가슴이 바쁘게 뛰기 시작했다. 가파른 벼랑을 오르내리길 몇 번, 마침내 불일암(佛日庵)을 지난 왼쪽 산죽밭에 완폭대는 그렇게 있었다. 바위 각자를 보니 1200여 년 전 그 어른을 뵙는 듯 아련하였다. 이끼가 낀 바위에 암각된 세 글자 ‘완폭대(翫瀑臺)’. 세월의 흐름을 그대로 안은 듯 ‘완’ 자와 ‘대’ 자는 비교적 선명하였으나. ‘폭’ 자는 거의 알아볼 수가 없었다. 저 바위에 앉아 불일폭포를 완상하였다니, 바위의 크기가 옹색하다. 조위한의 유두류록에는 ‘10여 명이 앉을 만한’ 바위라 적혀 있는데, 눈앞의 바위는 두 사람이 마주 앉으면 딱 알맞은 넓이였다.

‘스님아 청산이 좋다고 말하지 마오 (僧乎莫道靑山好)/ 산이 좋을진대 어찌 다시 산을 나가는가(山好如何更出山)/훗날 내 자취를 두고 보시오(試看他日吾踪跡)/한 번 청산에 들면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一入靑山更不還)’라는 맹세문 같은 입산시 한 수를 남기고 아직 행방이 묘연한 한 선비의 흔적을 마주하니, 당시의 ‘금수저’들에게 치여 현세를 버린 선비의 착잡함이 그 암각에 밴 듯하여 애석하였다. 더럽혀진 귀를 씻고(세이암, 洗耳巖) 현세를 버린 선비와 흐르는 물에 갓끈을 씻어 쓰고(탁영대, 濯纓臺) 벼슬길로 나아간 선비의 삶이 현실에 겹쳐 우울한 심사다. 버림과 나아감의 철학이 가르치는 지점이 어찌 이다지도 닮은 것인지. 탁영 김일손 선생은 그의 지리산 유람기인 속두류록(續頭流錄)에 다음과 같은 글귀를 남겨 단연 눈길을 끈다.

‘만약 내가 최고운의 시대에 살았더라면 반드시 그의 뒤를 따르며 그로 하여금 고독하게 불교도와 어울려 세월을 헛되이 하지 못하게 막았을 것이며, 만약 그가 오늘날 나왔다 하더라도 반드시 적당한 자리가 있어서 나라를 빛내는 문장을 펴내고 세월을 한결 아름답게 가꾸었을 것이고, 나 또한 그의 문하에 들었을 것이다’고 쓰여 있으니, 이 또한 안쓰럽다.

세상을 버린 선비의 숨결은 천 년을 넘어서고 있으나, 갓끈을 고쳐 쓰고 세상으로 나아간 선비 탁영 선생의 앞날 또한 순탄치 않아 억울한 죽임을 당하였으니, 듦과 남, 영원과 죽음의 철학, 이 절묘한 아이러니가 지금껏 회자되는 화개계곡에 서면 귀를 씻고 싶기도, 갓끈을 씻은 다음, 다시 정연하게 동여매고픈 사람도 있을 것이며 또한 민심을 읽지 못하는 자들에게 흐르는 물에 귀를 씻으라 권하고픈 사람도 있을 것이다.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고, 산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다 했던가. 눈 속에 칡꽃이 피는 동네 화개(花開), 여기 온갖 경계가 널린 곳 그러나 내 목측 너머는 너무 희미해져 좀처럼 읽어낼 수 없는 곳, 사람들은 그 경계점에서 고뇌하기도 하고 더러는 돌아서기도 하고 또 더러는 맞서기도 하며 한 세상 살아가는 것일 터. 그래서 또 꽃은 피우기도 지기도 하며 그 경계를 달랜다. 경계, 그 모호함 속에 우리들도 있다. 늘 그 경계에서 서성대고 있는 것이다. 이 두 지점을 오늘로 호출하면 역시 안쓰럽고 서운하다.

어느 후배 시인은 글에서 ‘말과 말이 뒤엉켜 세상은 마치 말로써 굴러가는 것 같다. 그 혼탁한 말들의 재앙 속에서도 계절은 매미 울음을 귀뚜라미 울음으로 바꾸어놓았다’고 하였다.

그 말들의 섞임 속에서도 계절은 어김이 없다. 이끼 낀 ‘완폭대’는 수많은 말을 전하고 있었으나, 귀가 어두운 후학은 그 깊은 말의 뜻도 알아듣지 못하고, 내가 사는 세상으로 내려왔다. 거기엔 여전하게 말과 말의 싸움터였다. 우리 국민 모두 ‘말(言)의 완상 시대’를 살아내는 것만 같아 안쓰러워지기 시작했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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