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얼마 전 내년 총선 물갈이 폭에 관한 질문을 받고 “사람은 물갈이 대상이 아니다”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대부분 사람은 ‘물갈이’라는 말에서 다분히 정치공학적인 계산속을 읽는다. 정당의 수뇌부나 특정 계파의 수장이 엄연한 헌법기관에 소속된 국회의원 한 명 한 명의 생살여탈권을 쥐고있는 듯한 오만함도 느껴진다. ‘물갈이’라는 명목이나 ‘물갈이에 반대한다’는 명분이나 결국은 ‘제 잇속 차리기’임을 신물날 만큼 많이 봐왔다.
그러나 부산에서 한국당 국회의원들을 대상으로 물갈이를 논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그 필요성에 공감하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 의문이다. 설사 ‘물갈이’로 표현되더라도 대대적인 인물 교체를 누구보다 지지할 곳이 부산이다. 한국당을 지지하든 하지 않든, 정치적 입장 차이나 관심 유무를 떠나서 말이다.
작년 6·13 지방선거 참패 직후엔 언뜻 교체의 싹이 보이는 듯했다. 6선의 김무성 의원이 내년 총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공개 선언했고, 4선의 김정훈 의원도 “적절한 시기에 책임 있는 정치적 입장을 밝히겠다”고 말해 지역 정가에선 불출마 선언으로 받아들였다. 초선의 윤상직 의원은 일찌감치 불출마를 공식화했기 때문에 다가오는 총선에서 모처럼 새 인물의 대거 등장을 기대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황교안 대표 체제가 출범하고 정부여당의 실정이 하나둘 쌓여가면서 슬그머니 분위기가 바뀌는 듯하다. 불출마는커녕 기왕의 말들도 쏙 들어가버렸다. 윤상직 의원은 보폭이 더 넓어졌고, 김정훈 의원도 이 문제에 아예 입을 닫아버렸다. 누릴 것 다 누린 다선의원들에겐 ‘용퇴’라는 말이 금기어가 된 듯하다. 2016년 총선에서 100% 현역 재공천이란 유례없는 짓을 벌인 새누리당(한국당 전신)이었다. 그런 악수가 쌓여 총선에서 참패한 것은 자업자득이겠지만 또 똑같은 길을 답습할 조짐이다.
한국당은 지난 총선·대선·지방선거 세 번의 선거에서 시리즈로 참패의 수모를 겪었다. 특히 지방선거에선 부산에서 완벽한 소수당으로 전락했다. 지방자치시대 개막 이후 처음으로 부산시장 자리를 민주당에 내줬고 시의원과 시의회 지도부도 민주당 일색이다. 16개 기초단체장 중 서구 수영구 기장군만 빼고 모두 민주당 출신이다. 민주자유당-신한국당-한나라당-새누리당-자유한국당으로 간판을 바꿔가면서도 ‘텃밭’으로 여겼던 부산에서다.
그래도 쇄신이나 혁신 노력은 없다. 선수만 쌓아온 의원들은 온실 속에서 자란 탓인지 결기도 용기도 없다. 자신들을 공천하고 자신들이 몸담은 당의 대통령들이 탄핵당하고 구속될 때 한 사람도 함께 책임지겠다는 이가 없었다. 국민 앞에 석고대죄한 이도 없었다. ‘친이’고 ‘친박’으로 불리며 권세를 누렸던 이들이다. 수십 년간 계속된 부산 시민들의 한국당 편애가 ‘이상한’ 사람들을 고관대작으로 만들어 준 것이다.
오히려 혼자 살겠다며 탈당했다가 나중에 슬그머니 복당한 사람이 부산에 4명, 경남에 3명이나 된다. 이들 중 상당수가 황 대표 체제에서 또다시 한 자리씩 꿰찼다. 양지가 음지로, 음지가 양지로 바뀌었지만 늘 햇볕만 쬐려는 사람들이다. 부산은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며 유신독재에 정면으로 맞선 김영삼, 3당 합당의 쉬운 길을 거부하고 가시밭길을 선택한 노무현을 낳고 그들을 대통령으로 만든 도시다. 지금 부산의 현역의원들이 이런 시민적 자존심에 부응하는 정치행로를 밟았는가.
한국당이 물갈이로 위기에서 빠져나온 대표적인 선거가 2004년 17대 총선이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파동과 대선자금 차떼기 파동에 대한 책임을 지고 다선 의원의 용퇴가 줄을 이었다. 부산에서만도 당시 한나라당의 박관용 김진재 유흥수 등 3선 이상 중진이 대거 불출마했다. 여당인 열린우리당에서조차 “저런 면이 있는 당인줄 몰랐다”는 말들이 나왔다. 결과는 열린우리당의 승리였지만 부산은 18개 선거구 가운데 17곳, 경남도 17석 중 14석을 한나라당이 차지했다. 이중에 초선 의원이 부산과 경남에서 7명씩 나왔다. 30대 국회의원도 등장했다. 대통령 두 사람이 감옥에 간 상황이 15년 전 그때보다 엄중하지 않은지 지금 한국당 의원들에게 묻고 싶다.
‘조국 사태’가 한국당의 반사이익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는 큰 착각이다. 정부의 불통에 실망했지만 한국당을 대안으로 보지 않는다는 민심이 각종 여론조사에 나타나지 않는가. 패스트트랙에 오른 선거법 개정안이 만약 내년 총선부터 적용되면 부산에도 큰 요동이 칠 것이다. 부산 시민도 자기희생의 감동없이 실망과 혐오감만 주는 정당과 의원들에 대한 맹목적 애정을 거둘 때가 됐다. 한국당이 ‘그 나물에 그 밥’을 또 내놓으면서 지지를 바라는 건 어불성설이다. 염치는 조국에게만 요구되는 게 아니다.
논설위원 flut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