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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도설] 인간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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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2월 초 부산 사하경찰서 관내에서 발생한 9살 여자 아이 유괴사건을 취재할 때다. 경찰이 공개수사에 나선 지 사흘 만에 목격자가 나타났다. 며칠 전 차를 타고 가다 큰길가에 서 있는 성인 남성과 여자 아이를 봤는데 유괴전단 속 실종 어린이의 인상 착의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남성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다. 고심하던 경찰은 두 차례에 걸쳐 최면을 유도했고 마침내 귀 모양이 특이했던 남자를 떠올리게 하는데 성공했다. 유산 문제에 불만을 품고 조카를 유괴해 살해 암매장했던 비정한 큰아버지는 그렇게 수갑을 찼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강호순 유영철 정남규 등 연쇄살인범 사건 때도 최면술이 행해졌지만 특히 힘을 발휘하는 경우는 뺑소니 사고다. 목격자나 피해자는 차량의 색깔 모양 차종, 심지어 번호판까지 또렷하게 복원하기도 한다. 살인 강간 절도 사건에서는 범인을 특정하거나 몽타주를 그리는 데 유용하다. 그러나 최면수사가 사건 용의자를 상대로 시행되는 일은 흔치 않다고 한다. 본인이 협조하지 않으면 최면이 불가능할 뿐더러, 최면을 가장해 거짓 진술을 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최면술은 그 자체가 결정적 증거라기보다 범죄를 재구성하는 데 필요한 퍼즐의 한 조각이 된다.

부산교도소에 수감 중인 무기수 이춘재를 상대로 30여 년 전 발생한 9건의 화성 연쇄살인사건 가운데 DNA가 일치하는 3건 외 나머지 6건과의 연관성에 대한 경찰 수사가 한창이다. 7차 사건 직후 범인과 마주쳐 몽타주 작성에도 참여했던 버스안내양이 최근 최면수사에서 이춘재가 자신의 기억 속 범인과 일치한다는 진술을 했다. 사건이 오래돼 증거가 거의 없는 상황이다. 공소시효는 지났지만 진실을 밝히는 데 과연 이 목격자의 기억이 결정적인 단서가 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사람의 뇌가 하는 가장 큰 착각이 바로 “내 기억이 옳다”는 것이라고 한다. 인간의 기억이 그만큼 왜곡되거나 오염될 소지가 높다는 말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선 이런 말도 한다. ‘기억의 보편적 원리 중 하나는 실제 회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의 정보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기억을 못 하는 것은 저장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단지 재생에 실패했기 때문이다’(1995년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연보). 인간의 뇌처럼 불완전한 게 없다지만 가능성이 무한한 것도 사실이다. 사소한 실마리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수사기관으로선 그런 잠재력을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는 것이다.

강필희 논설위원 flute@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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