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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칼럼] 미치도록 바꾸고 싶은 것들 /이경식

한국사회 신분제 고착화, 청년들 절망…포기 행렬

개혁은 최상층 국회부터…무노동 무임금 도입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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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도록 잡고 싶다.” 1986년 9월부터 1991년 4월까지 발생한 10건의 화성 연쇄살인 사건을 상징하는 가장 강렬한 말이다. 국내 단일사건 중 최대 규모인 연인원 205만여 명의 경찰이 동원돼 2만1280명을 수사하고도 범인을 잡지 못했으니 그 심정이 오죽하겠는가. ‘너는 자수하지 않으면 사지가 썩어서 죽는다’는 피해지역 주민들의 저주, ‘화성은 끝나지 않았다’는 담당 수사 책임자의 저서 제목 등등. 화성 사건의 모든 기억은 이 한마디로 수렴된다.

잡고 싶은 것은 범인만이 아니었다. 그토록 많은 인력을 투입하고도 헛바퀴만 돌렸던 검찰과 경찰의 무능 또한 붙잡아 문책하고 싶었다. 무능은 은폐를 위한 자기 합리화를 초래하고, 이는 폭력에 대한 욕망을 증폭시키는 요인이 됐기 때문이다. 조금만 의심스러워도 용의자로 체포해 조사를 벌이는 바람에 애꿎은 피해자가 속출했다. 명확한 증거도 없이 범인으로 몰려 강압수사를 받은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 4명이나 되는 등 화성 사건의 기억은 폭력으로 얼룩져 있다.

봉준호 감독은 화성 사건을 다룬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범인 체포 열망을 탈폭력 열망으로 승화시켰다. ‘살인의 추억’은 그래서 ‘폭력의 추억’이기도 하다. 형사로 출연한 배우 김상경이 “살인을 기억하는 것 자체가 응징의 시작”이라고 했듯이, 폭력을 기억하는 것이 바로 탈폭력의 출발점이어서다. 봉 감독은 영화에 폭력의 시대를 종식하고 민주와 평등의 시대를 열고자 하는 염원을 담았다.

그 바람이 싹튼 화성 사건이 30년 세월을 훌쩍 넘어 현재로 호출됐다. 최근 화성 사건의 유력 용의자가 특정되면서다. 용의자 특정의 근거가 된 DNA 대조 결과는 오류 확률이 ‘10의 23제곱분의 1’이라고 하니, 화성 사건은 해결 가닥을 잡은 듯하다. 머잖아 오래 버려둔 역사의 빈칸도 채울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하지만 민주와 평등의 시대는 아직 열리지 않았다. 봉 감독의 걸작 ‘기생충’은 그 실상을 자못 충격적으로 묘사한다. 갈수록 커지기만 하는 빈부 양극화의 수직 격차를 통해서다. 위장 취업이 들통나 고지대 부자집에서 쫓겨나 홍수에 잠긴 저지대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기생충 가족’의 모습은 우리 사회 맨 밑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듯하다.

현실은 영화보다 훨씬 비극적이다. 원청업체의 하청업체에 대한 ‘위험의 외주화’가 단적인 예다. 발전업계의 경우 재해의 93%가 하청에서 발생하지만 임금은 원청 정규직의 53~77%에 불과하다. 재하청으로 내려가면 임금 수준은 31%로 떨어진다. 하청 노동자의 사망 사고는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지난해 산업재해로 숨진 하청 노동자는 312명으로, 사망자가 하루에 한 명꼴이었다. 심지어 원청 노동자가 숨지면 계수 12를 곱해 평가점수를 감점하지만 하청 노동자의 감점 계수는 4로 제한한다. 죽음마저 서열화하는 셈이니, 차별도 이런 차별이 없다.

계층 상승의 ‘교육 사다리’도 빠르게 사라져가고 있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은 옛말이 된 지 오래다. 서울 상위 7개 대학의 경우 부모의 월평균 소득이 922만 원을 넘는 고소득층 학생이 78%에 달한다. 가난한 가정의 우수 학생이 많이 갔던 교대도 그 비율이 65%에 육박한다. 조국 법무부 장관 의 자녀에게서 보듯이 부모의 든든한 사회적 지위는 명문대 진학 스펙쌓기의 필수요건이다. 부와 권력이 대물림되는 ‘현대판 신분제’가 고착화되는 형국이다.

이러니 ‘살인의 추억’ 시대의 민주·평등 열망이 ‘기생충’ 시대에는 부·권력 대물림 근절 열망으로 바뀌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상황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3포(연애·결혼·출산 포기) , 5포(3포+내집 마련·인간관계 포기), 7포(5포+꿈·취미 포기) 등 물 밀듯 이어지는 포기 행렬도 막기 어렵다. 문제는 정치권에선 이를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거다. 정확히 말하면, 신분제를 당연시하고 있는 듯하다. 밥 먹듯 ‘정치 파업’을 해도 특권적 대우를 잃지 않는 국회의원들에게서 그런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하청 노동자를 ‘위험의 외주화’에서 보호할 수 있는 법안이 국회에 이미 발의돼 있는데도 입법에 신경 쓰는 의원은 드물다. 20대 국회의 법안처리율(29%)은 역대 국회의 절반 수준에 그쳤다. 하지만 ‘무노동 무임금’ 원칙은 적용되지 않는다. 의원들은 매달 급여와 입법활동비 등 1000만 원이 넘는 돈을 꼭꼭 받아 챙긴다. 지방의원에 적용되는 ‘국민소환제’도 예외다. 신분제 피라미드의 최상층을 차지하는 귀족인 셈이다. 따라서 신분제 타파 운동은 국회로부터 시작하는 게 옳다. 의원들이 특권을 고집한다면 시민사회의 계층화도 막기 힘들다. 20대 국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 최소한 ‘무노동 무임금’은 도입하는 게 어떨까. “미치도록 소환하고 싶다”는 원성을 듣지 않으려면 말이다.

논설위원 yisg@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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