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담고 사는 내면의 전쟁만으로도 버거운 것이 나의 삶이지만, 요즘에는 바깥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이 더욱 심각하게 다가온다. 살아 있는 한, 뭔가를 지향하여 노력하는 한, 안팎으로 싸움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몸에 열이 나는 것은 건강한 상태에서 이탈한 몸이 저절로 낫는 자연치유력의 발동인 것처럼, 또는 지난 태풍 ‘타파’가 교란된 자연질서를 원상 복구하자는 몸부림인 것처럼, 지금 우리 사회를 몰아치는 일진광풍, 정치판의 싸움도 자연치유력의 발동이기를, 교란된 사회질서를 바로잡는 몸부림이기를 희망하지만, 혹 이러다가 돌아서기에는 너무 멀리 가버리는 건 아닐까 걱정이다.
문득 고대 그리스의 헤라클레이토스를 떠올린다. 그는 세상 만물은 단순히 흘러가고 변화하는 것을 넘어 다양한 모순을 통해 새로운 양상으로 전환한다고 보았다. 모순은 끊임없는 투쟁을 통해 극복된다는 것이다. 이렇듯 지금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갈등과 싸움도 조화와 상생을 위한 몸부림이기를 희망한다. 사실 그냥 심심한 평화가 아니라면, 사람이든 사회든 그 속에는 늘 다양한 모순이 있게 마련이다. 어떤 의미에서 평화는 다만 ‘기우뚱한 균형’에 불과하다. 이미 다 이루어진 세계가 아니라 이루어가고 있는 세계라면, 기우뚱함은 균형의 짝일 수밖에 없다. 기우뚱하므로 균형이 있으며, 균형은 다시 기우뚱해지기 마련이다. 그래야 살아 있는 균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 있는 균형을 이룰 것인가? 우선은 싸움이 불가피한 현실임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싸움이란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니라 사회의 모순과 갈등이 해소될 수 있는 자연치유력의 발동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지내기를 기대하기보다는, 싸우면서 사이좋게 지내는 싸움의 기술이 필요하다.
싸움이 서로의 이해 지평을 맞추려는 노력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상대방을 파트너로 인정할 필요가 있다. ‘달도 차면 기우나니…’. 누구나 알 만한 유행가 가사의 한 구절이다. 이보다 더 간명하게 세상 이치를 표현한 금언이 있을까 싶다. 내내 차지 않는 눈썹달이 없는 것처럼, 내내 기울지 않는 만월도 없다. 싸움의 한복판에 있는 사람이든 또는 구경꾼이든, 우리 모두는 달도 차면 기운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멀리 보면 이기는 자도 없고 지는 자도 없다. 설사 지금 이기는 자가 된다 할지라도 머지않아 지는 자가 될 것이며, 지금 지는 자 또한 머지않아 이기는 자가 될 수도 있다.
‘승리와 패배를 하나로 여기고 나가 싸워라!’ 인도의 고전 ‘바가바드기따’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전장 한복판에 마차를 세우고 스승 끄리슈나가 미혹에 빠져 어쩔 줄 모르는 아르주나에게 건네는 가르침이다. 싸우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승리와 패배를 하나로 여기고 싸우라는 것이다. 참으로 비현실적이고 한가한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진리의 화신 끄리슈나는 승자도 없고 패자도 없는 싸움의 기술을 전한다. 대개 싸움은 승리를 위한 것이며, 승리를 위한 싸움은 흔히 너 죽고 나 살자는 싸움으로 치닫게 마련이다. 그것은 이해의 지평을 맞추려는 노력일 수 없다.
문제는 승자가 있는 한 패자가 있을 수밖에 없고, 패자가 있는 한 싸움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진짜 적(敵)은 건너편에 대치한, 창과 칼로 무장한 적군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탐욕과 증오라고 했다. 삶이라는 전장에서 우리를 쓰러뜨리는 것은 건너편의 적군이 아니라 스스로의 내면에 감춰진 탐욕과 증오라는 것이다. 인도 수행전통의 절정 딴뜨라에서는 좀 더 적극적인 싸움의 기술을 가르친다. ‘이 세상에는 불필요한 것으로 버려도 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불완전한 것이 있을 뿐이다’. 설사 지금 당장은 적으로 여겨지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그는 불필요한 존재로서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결국에는 함께 공존해야 하는 불완전한 존재일 뿐이며, 불완전하기로 치자면 우리 모두는 오십보백보라는 것이다. 동병상련. 지금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갈등과 싸움이 부디 서로 이해의 지평을 맞추자는 노력이기를, 이미 너무 멀리 와버린 에필로그는 아니기를….
선문대 대학원 통합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