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8월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의 한 아파트에서 40대 여성이 피투성이 주검으로 발견됐다. 다행히 범인은 잡혔다. 흑인 남성이었다. 검찰은 그의 차 안에서 발견된 피살자 남편의 노트북, 여자 친구와 동료 수감자의 증언을 살인 증거로 제시했다. 남자는 범행을 부인했지만 결론은 사형이었다. 하지만 집행 당일인 2017년 8월 22일 오후 2시 주지사가 형 집행 중단을 명령했다. 살인 도구로 쓰인 흉기의 DNA 분석에서 다른 사람이 용의자로 특정된 것이다. 사형 집행 불과 4시간 전의 일이었다.
시국사건이 아닌 일반 형사사건에서 재심은 흔하지 않다. 이미 확정된 판결을 뒤집을 만한 명백한 근거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재심이 검사와 판사의 오류를 전제하는 만큼 재조법조계에선 탐탁지않게 여기는 측면도 있다. 그럼에도 부산 엄궁동 낙동강변 살인사건처럼 어렵사리 재심이 개시되거나 재심으로 죄를 벗는 사례도 없진 않다. 국회 자료를 보면 재심 요청의 절반이 거절되지만 일단 재심이 결정되면 무죄 선고 비율은 50% 이상이다. 범행의 증거라곤 용의자나 공범의 자백뿐인 상황에서 그 자백마저 수사기관의 강요에 의한 허위임이 입증되면 이런 결과로 이어진다.
요즘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화성연쇄살인범 이춘재가 1988년 8차 살인사건도 자신의 범행이라고 자백해 논란이다. 경찰은 당시 윤모 씨의 모방범죄로 결론내렸다. 현장에서 수거한 체모를 방사성동위원소 감별법으로 분석한 결과가 한국 사법사상 처음으로 재판 증거로 채택돼 화제가 되기도 했던 사건이다. 그런데 이춘재의 말대로라면 경찰이 엉뚱한 사람을 범인으로 몬 게 된다. 윤 씨가 주간지와의 옥중인터뷰에서 자신은 범인이 아니라고 주장했던 사실도 뒤늦게 주목받고 있다. 무기수에서 20년형으로 감형받은 그는 10년 전 가석방됐다.
이춘재가 8차 사건의 진범으로 밝혀지면 사형제 폐지론이 새삼 조명될 가능성도 크다. 사형제가 유명무실하게 된 요즘과 달리 20여 년 전만 해도 형장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억울함을 호소하던 사형수가 있었다. 사귀던 여성의 가족을 살해한 죄목으로 처형된 사형수의 무고함을 추적한 조갑제 기자는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 첫 구절에서 ‘살인 현장을 본 사람들은 사형 존치론자가 되고 처연한 사형집행을 목격한 사람들은 사형 폐지론자가 된다’고 썼다. 화성연쇄살인이라는 사상 최악 미제사건의 해결을 눈앞에 둔 경찰이 과거 수사의 진실과도 마주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졌다.
강필희 논설위원 flut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