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8년(조선 중종 13년) 2월 11일 장령 유옥(柳沃)은 어전에서 토지가 소수에게 집중되는 폐단의 해결책으로 모든 백성에게 토지를 균등하게 분배하는 법, 곧 균전법(均田法)을 주장했다. 나아가 그는 노비의 소유 상한선까지 정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중종은 균전법에 대한 주장은 과거 있었으나 시행된 적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사실상 반대한 것이었다.
같은 해 5월 27일 사섬시 주부 박수량(朴遂良) 역시 빈부 격차가 너무나 심하므로 균전법을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한 고을에 수백 결(結)의 땅을 소유한 지주가 있는 현실을 방치할 경우 5, 6년이 지나면 그 고을의 토지는 불과 5, 6명의 소유가 되고 만다는 것이었다. 이날 영사(領事) 신용개(申用漑)는 박수량의 균전법에는 찬성하지 않았지만, 소수 지주의 토지 독점을 막을 제도적 장치를 모색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의 없이 동의했다.
같은 날 저녁 어전에서 기사관 유성춘(柳成春)이 다시 균전제의 시행을 역설했다. 자신이 목도한 바에 의하면 순천(順天)의 지주들은 많으면 1만 석, 적어도 5000, 6000석의 곡식을 축적하고 있었으며, 파종하는 종자 역시 200여 석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한 고을의 경작지는 2, 3인의 소유가 되어 있고 나머지 사람은 경작지가 없었다는 것이다. 유성춘은 지주의 원망은 있겠지만, 백성이 혜택을 받을 것이라는 논리로 균전법의 시행을 촉구했다. 당연히 중종은 또 거부했다. 이에 참찬관 권벌이 시행할 것을 거듭 요청하자, 중종은 대신과 상의할 것이라고 답했다.
유성춘이 균전제를 주장한 그 다음 날인 5월 28일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은 토지 소유의 상한선을 50결로 하고, 상한선을 넘는 토지를 타인의 이름으로 소유하는 것도 금지하자고 제안했다. 정광필의 제안은 다름 아닌 한 개인의 토지 소유 상한선을 법으로 정해 두는 한전제(限田制)였다. 한전제는 자연스럽게 토지 소유를 균등하게 만들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두 달이 지난 7월 29일 어전에서 때 신용개 역시 과거에는 실패했지만 이번에는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거듭 한전제의 시행을 주장했다. 시독관 김구, 사경(司經) 정응 등도 모두 지치(至治), 곧 이상적 정치의 실현을 위해 한전제의 시행이 불가피하다며 신용개의 편을 들었다.
1년이 지난 1519년(중종 14년) 7월 2일 기준(奇遵)은 “토지가 균등하지 않기 때문에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빈자는 송곳 하나 꽂을 땅이 없어 유리(流離)·파산하게 되니, 제도가 공평하지 못한 것이 그 이유입니다”고 하면서 다시 균전제의 시행을 주장했다. 기준의 균전제에 대해 정순붕(鄭順朋)은 한전법으로 소수의 과도한 토지 소유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자, 기준은 근자에 토지 소유 상한선을 50결로 제한했지만 결국 실패했음을 상기시켰다. 이 50결은 1년 전 정광필과 신용개가 제안했던 토지 소유의 상한선을 말하는 것일 터이다. 사실 50결은 엄청나게 넓은 땅이다. 그것은 결코 지켜질 수 없는 상한선이었던 것이다.
1519년 7월 2일의 논의를 끝으로 균전제 한전제 등 토지개혁에 관한 논의는 사라진다. 불과 4개월 뒤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1517·1518·1519년 3년 동안 균전제와 한전제의 시행을 주장한 사람들은 이른바 기묘사림(己卯士林)이라 불리는 개혁 사림 세력이었다. 중종반정 이후 권력 핵심부를 장악했던 이들의 개혁 프로그램에는 토지제도 개혁도 들어 있었던 것이다. 기묘사림의 토지와 노비의 소유 상한선, 곧 재산의 상한선을 법으로 정하자는 발상은 어찌 보면 대담하고 어찌 보면 무모하기조차 하다. 하지만 그 발상의 이면에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극심한 빈부 격차가 생기고 그 결과 국가의 근간이 양민이 몰락할 것이라는 위기감이 깔려 있었다.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 기득권 세력에 몰려 기묘사림이 실각한 이후 개혁을 표방하는 대규모 정치세력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기득권 세력을 잡도리하지 않으면 개혁은 실패하는 법이다. 사족들이야 특권과 토지를 소유하고 교양으로 치장한 채 인간답게 살았지만, 보통 백성의 삶은 그와 정반대 편에 놓여 있었다. 오늘날이라고 무어 다를 것이 있을까?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