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들이 즐겨하는 옛날 군대 이야기다. 멧돼지와 관련된 경험이다. 군량이 넉넉지 않던 시절에 멧돼지를 발견하는 건 병사들에게 행운이었다. 부족한 단백질을 보충하는 회식 날이 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물론 성질 사나운 멧돼지를 잡으려면 사살 명령과 정확한 사격 등의 운이 따라야 했다.
대한민국 남자의 군대 이야기는 다 믿을 게 못 되지만, 거의 일치하는 것은 하나 있다. 멧돼지 쓸개는 대부분 사단장에게 상납(?)했다는 주장이다. 그만큼 멧돼지 쓸개가 몸에 좋다는 것이다. 여러 동물의 쓸개 가운데 웅담 즉 곰의 쓸개 다음으로 효능이 뛰어나다고 한다. 고혈압 동맥경화 등 심혈관 이상이나 간염·간경화증 등 간장 이상을 다스리는 데 효과를 본다고 알려져 있다. 전통의학에서는 쓸개가 기운을 발동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본다. 봄의 생명력이 메마른 대지를 뚫고 나오는 것과 같은 효능을 말하는 것이다. 불의(不義)를 보고도 화를 내지 않는 이를 보고 ‘쓸개 빠진 놈’이라고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가격도 고가여서 지금도 30만~100만 원에 거래될 정도란다.
그 시절 멧돼지는 귀했다. 숲이 깊고 인적이 드문 곳에서나 볼 수 있었다. 잡기는 쉽지 않았다. 호랑이 늑대 등이 사라진 생태계에서는 최강의 맹수였다. 호랑이 없는 골에 멧돼지가 왕이 된 격이다. “성난 멧돼지는 호랑이보다 무섭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니까. 저돌적(猪突的)이라는 표현도 멧돼지의 사나운 성질에서 나온 말이다.
이런 멧돼지는 요즘 문제를 일으키는 천덕꾸러기가 됐다. 2000년대 들어 개체 수가 급증하면서 일어난 현상이다. 현재 멧돼지는 전국적으로 45만 마리가 넘게 서식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산림녹화사업으로 서식 환경이 좋아지고 1980년대 자연 복원을 위해 멧돼지를 방생한 결과다. 하지만 개체 수 급증은 먹잇감 부족 현상을 초래하고, 민가를 공격하는 멧돼지는 덩달아 늘어났다. 이 바람에 농작물 피해가 심하고 사람이 해를 입는 일이 종종 일어나고 있다.
최근 멧돼지는 아프리카돼지열병(ASF)의 유력한 감염 경로로 지목받고 있다. 이 때문에 대대적인 소탕 작전이 내려졌다. 농림축산식품부는 민간인출입통제선(민통선) 내에 군 사격수, 민간 엽사, 탐색장비 운용인력 등의 29개 민관군합동포획팀을 투입했다. 그 결과 15일 하루 동안 57마리가 사살됐다. 전국적으로 이날 하루 멧돼지 628마리가 잡혔다고 한다. 멧돼지의 운명이 참 얄궂다.
정순백 논설위원 sbjun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