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최고의 시가집인 ‘만엽집(萬葉集)’에는 ‘병사의 노래(防人歌)’ 84수가 실려 있다. 징집되어 고향을 떠나는 병사들이 남긴 것인데, 시가마다 이별의 아픔이 절절하다. ‘내 여행은 여행이라고 단념하지만 집에서 아이를 껴안고 (내 걱정으로) 바짝바짝 마르고 있을 아내가 가엾다/일부러 잊어버리려고 들을 넘고 산을 넘어 왔지만 내 부모는 잊혀지지 않는다’. 아들의 안전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속은 타들어 간다. ‘집에 남아서 그리워하느니 네 허리에 차는 칼이라도 되어 (너를) 지켜주고 싶다’.
만엽집에는 신라에 사신으로 가는 남편과 아내가 주고받은 시가도 있다. ‘큰 배를 거친 바다에 띄우고 떠나시는 당신 무사히 빨리 돌아오세요/아무 일 없기를 당신이 목욕재계하고 신에게 빌어준다면 바다의 파도가 무수히 일어나도 사고가 나겠는가’. 아내가 남편의 무사귀환을 염원하자, 남편은 자신의 안전을 기원한다면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화답한다.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인간의 보편적 정서다. 그 정서는 사랑과 평화로 수렴된다. 만엽집의 진정한 가치는 거기에 있다.
일본은 연호제를 도입한 뒤 줄곧 중국 고전에서 연호를 따왔다. 그러다 지난 5월 1일 즉위한 나루히토 일왕의 새 연호를 자국의 고전인 만엽집에서 인용한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 ‘초봄 길한 달/기 맑아지고 바람 부드럽다(初春令月/氣淑風和)’는 구절에서 따온 새 연호 ‘레이와(令和)’의 뜻이 ‘평화·조화’인 데서 그 취지를 확인한다. 일본은 최근 자국에 큰 피해를 야기한 제19호 태풍 ‘하기비스’에도 ‘레이와 원년 ○○태풍’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로 했다. 일본이 태풍에 별도의 작명을 하는 것은 1977년 ‘오키노에라부 태풍’ 이후 42년 만이다. 여기서도 평화에 대한 간절한 바람을 목격한다. 약 90명이 숨지고, 1만 채가 넘는 집이 침수되는 등 미증유의 재난을 당했으니 그 심정이 오죽하겠는가.
일본 정부가 이렇듯 자국의 평화를 원한다면, 다른 나라에 대한 행태 또한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 하지만 실상은 정반대일 경우가 많다. 종군 위안부, 강제징용 등 일제강점기 저지른 각종 만행에 대한 사죄와 보상을 외면하는 것이 특히 그렇다. 게다가 외교·인권 문제를 경제보복으로 제압하려 드니, 새 연호의 정신과 어긋나는 ‘레이와의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일본 정부는 이런 역설 속에서 오는 22일 나루히토 일왕의 즉위식을 치를 예정이다. 일본식 외교문법대로라면, ‘레이와’의 뜻을 ‘위선’이라 읽어야 한다.
이경식 논설위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