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의민주주의에 따라 입법부가 법률을 제·개정하고, 행정부는 법률에 따라 위임된 하위법령을 만들고 집행한다. 이렇게 형성된 제도 속에서 일상을 영위한다. 그런데 일상의 관행(慣行)은 나라마다 다르다. 어떤 나라는 부모의 지위가 자녀의 성공에 결정적 요인인데 반해, 다른 나라에서는 별 영향을 주지 못한다. 어떤 나라는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데, 다른 나라에서는 과도한 경쟁과 승자독식을 바람직하지 않게 여긴다. 어떤 나라는 부패지수가 높고 갈등이 과도한 반면, 다른 나라는 부정부패와 사회적 갈등이 별로 없다. 어떤 나라는 사회적 연대가 공고하고 높은 세금에 대한 사회적 수용성이 높은 반면, 다른 나라는 사회적 배제가 심하고 조세저항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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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서상균 |
왜 그럴까? 먼저 법에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한다. 법의 내용적 부실이 제도의 미비로 이어지고, 이것이 불공정한 일상의 관행을 낳게 된다. 다음으로 법의 내용이 비교적 충실해도 국민의 상당수가 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저항감을 갖는 경우도 있다. 이럴 경우에도 바람직하지 않은 관행이 지속된다. 한편, 좋은 내용의 새로운 법이 마련되더라도 이것이 일상의 관행 속으로 스며드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경우도 생각해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정의의 원칙에 충실한 좋은 내용의 법을 만들고, 관련 제도를 일상의 관행으로 뿌리내리도록 해야 한다. 더불어 위법 행위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처벌하고 제재하는 게 옳다.
지난 22일 문재인 대통령은 국회 시정연설에서 ‘합법적 불공정’을 언급했다. “국민의 요구는 제도에 내재된 합법적 불공정까지 근본적으로 바꿔내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공정’이 바탕이 돼야 ‘혁신’도 ‘포용’도 ‘평화’도 있을 수 있다며, 경제뿐만 아니라 사회·교육·문화 전반에서 ‘공정’이 새롭게 구축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런데 시정연설에서 언급된 ‘합법적 불공정’은 이후 제대로 공론화되지 못했고, 정치적 반대자들의 비판 소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정쟁과 무관하게 시정연설에서 강조됐던 ‘합법적 불공정’은 반드시 우리 사회의 공론화와 정치사회적 숙의를 거쳐 올바른 해법이 도출되고 입법·제도화로 이어져야 한다. 그래야 실질적 민주주의와 복지국가의 실현이 가능해진다.
‘합법적 불공정’은 법과 제도 속에서 불공정이 체계적으로 작동한다는 뜻이다. 민주국가에서 ‘불법’은 거의 언제나 ‘불공정’하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선 ‘합법’의 틀 속에서 작동하는 ‘불공정’ 사례가 너무나 많다. 그 이유와 해법을 찾아내야 한다. 이를 위해 문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강조했던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는 말을 다시 꺼내 볼 필요가 있다. 이는 복지국가의 철학적 기반이 된 롤스의 ‘정의의 원칙’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합법적 불공정’이 거의 없는 공정한 복지국가들은 ‘정의의 원칙’을 입법으로 제도화했고, 이를 일상적 관행 속에 스며들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이들 복지국가는 ‘정의의 원칙’에 따른 실질적 공정이 주는 높은 수준의 제도적 행복을 누리고 있다.
‘정의의 제1원칙’은 평등한 자유의 원칙인데, 공민권뿐만 아니라 정치·경제적 자유의 보장까지 확장된 개념이다. 모든 민주국가는 제1원칙을 법과 제도로 구현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도 관련 법령을 통해 선진국 수준의 자유권을 보장하고 있다. 그런데 제1원칙의 경제(시장)적 자유는 불평등을 초래한다.
롤스는 불평등을 용인하는 조건을 ‘정의의 제2원칙’으로 제시했다. 먼저 ‘2-b 공정한 기회균등의 원칙’이 작동한다. 모두에게 개방된 직책·지위를 얻기 위한 경쟁에서 실질적 기회균등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 원칙이 경제와 복지 법령에 제대로 규정되고 제도화돼야 제1원칙에서 초래되는 불평등이 최소화된다. 다음으로 ‘2-a 차등의 원칙’이 작동한다. ‘공정한 기회균등의 원칙’을 통해 사회경제적 차이로 인한 불평등을 최소화해도 자연적 차이(지능, 체력, 외모)로 인한 불평등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결국 ‘차등의 원칙’은 복지를 통해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의 이익이 되는 법과 제도를 요구한다.
‘정의의 원칙’이 법과 제도로 확립돼야 공정한 나라가 될 수 있다. 제1원칙, 제2-b원칙, 제2-a원칙이 축차적 우선순위에 따라 내용적으로 충실하게 입법·제도화돼서 일상의 관행으로 스며들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국민이 행복한 나라가 될 수 있다. 유엔 세계행복보고서에서는 행복 점수를 산출하는 6가지 지표로 1인당 국민소득, 건강 기대수명, 사회적 지지, 내 삶을 선택할 자유, 관용, 부패지수를 설정했다. 행복 점수는 ‘정의의 원칙’이 축차적으로 잘 제도화된 선진복지국가에서 가장 높았다. 핀란드 덴마크 노르웨이 아이슬란드가 1~4위를 차지했고 스웨덴은 7위였다. 모두 북유럽 복지국가들이다. 반면에 정의의 제1원칙만 강조되고 제2원칙의 법적 제도화가 부실한 신자유주의 체제의 대표 국가인 영국과 미국은 15위와 19위에 그쳤고, 우리나라는 54위였다.
국세청에 따르면 2017년 상위 0.1%에 속하는 2만2482명의 통합소득(근로소득+종합소득)은 전체 신고자 2248만 명이 올린 통합소득의 4.3%를 차지했다. 상위 0.1%의 통합소득은 하위 27%(629만5000명)의 그것과 같았다. 게다가 상위 0.1%의 통합소득 점유율은 2013년 3.8%에서 2017년 4.3%로 올랐다. 또 소득상위 1%의 통합소득은 2013년 전체의 10.7%였지만 2017년 11.4%로 늘었다. 2017년 상위 1%의 통합소득은 하위 43%의 그것과 맞먹었다. 왜 이렇게 됐을까? ‘불법’ 때문일까, 법과 제도의 미비로 인한 ‘합법적 불공정’ 때문일까. 문 대통령이 시정연설에서 공정을 강조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람에 투자하고 공정한 기회균등을 보장하는 보편적·적극적 복지와 공정한 경제를 법령에 담아 제도화하면, 머지않아 우리도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운” 국민행복의 복지국가가 될 수 있다.
제주대 교수·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