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 80년대 부산 사하구 하단 을숙도는 철새 도래지로 유명했지만 에덴공원과 시온섬 등은 젊은이들이 즐겨 찾던 낙원이기도 했습니다. 끝없이 펼쳐진 갈대와 강을 붉게 물들인 동양 최대의 황금빛 노을이 장관을 이루었고 강을 오르내리던 나룻배의 정경은 한 폭의 그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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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숙도 가을 풍경(왼쪽)과 브람스 교향곡 4번을 담은 음반. |
당시 하단 에덴공원 갈대숲 사이엔 ‘강변’이라는 카페가 있었는데 강변 카페 옆으로는 수로가 길게 이어져 있었고 뒷문 난간 바로 옆까지 돛단배가 와 닿곤 했지요. 카페 안쪽으로 들어서면 조그만 무대가 있었고 무대에 놓였던 탄노이 아덴 스피커와 매킨토시 6100 앰프가 이곳이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공간임을 말해주었습니다. 갈대로 엮은 벽과 천장이 바깥 풍경과 잘 어울렸고 그곳에서 즐겨 듣던 브람스의 ‘현악 6중주 1번 2악장’과 드보로작의 ‘첼로 협주곡 B단조’ 그리고 막스 부르흐의 바이올린 협주곡 등은 그 어느 훌륭한 음악실에서 듣는 것보다 좋았습니다.
가을비 내리던 어느 날 창밖 갈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을 보며 들었던 슈베르트의 교향곡 8번(일명 미완성 교향곡)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감동으로 남아 있습니다. 인디언 아라파호족은 11월을 ‘모두가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고 한다지요. 아직은 희망이 남아 있다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저는 모든 것이 사라져 가는 듯한 아쉬움과 쓸쓸함을 직설적으로 이렇게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11월이 되면 어쩔 수 없이 텅 빈 내면의 들판과 마주 서게 되고 그곳에서 심오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그럴 때면 브람스의 선율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갑니다. 브람스의 음악은 내면적인 깊이와 엄숙함이 배어 있어 처음엔 좀 어렵게 느껴지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심오한 세계로 빠져들며 늦가을 텅 빈 가슴을 따뜻하게 감싸줍니다.
브람스는 사강의 소설 ‘브람스를 아세요‘에서 인용한 교향곡 3번 3악장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저는 요즘 교향곡 4번과 독일 레퀴엠에 심취해 있습니다. 브람스는 교향곡 4번에서 인생의 가을을 노래했는데 그 스스로도 임종 때 ‘가장 좋아하는 곡’이라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그가 쉰두 살에 작곡한 이 곡에는 평생 독신으로 지낸 만년의 고독한 정서가 잘 나타나 있으며 인생의 황혼을 짙게 느낄 수 있습니다. 또한 브람스는 ‘독일 레퀴엠’ 중 두 번째 곡인 ‘모든 육체는 풀과 같으니’에서 인생의 무상함과 숭고한 종교적 사상을 진지하게 표현했습니다.
가을이 깊어질 때는 낙동강 하구 갈대 숲과 강변이 그리워집니다. 해 지는 강가에서 검붉게 타오르던 노을과 갈대숲은 도시의 개발과 함께 사라진 지 오래지만 지금도 그 강가에 가면 갈대밭을 헤치고 불어오는 가을 바람을 타고 젊은 날 즐겨 듣던 선율이 귓전을 스쳐 지나갈 것만 같습니다. 가을! 그 오랜 기억들과 함께.
필하모니 대표·음악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