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집 거실에서 연신 안경을 닦으며 중얼대는 아내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안경을 새로 한 지 얼마 안 되는데 흐릿하게 보이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푸념이었다. 아내를 한 번 힐끗 쳐다본 필자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5, 6년 전의 어느 날, 며칠째 계속 안경이 흐릿하게 보여 닦고 써보기를 반복해도 변함없기에 안경을 높이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던 필자에게 어느 선배 교수가 했던 말. “원 교수님! 안경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이제 원 교수님도 노안이라 그런 거예요.” 순간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노안이라니! 내 나이 이제 막 50세가 넘었을 뿐인데 말이다. 그랬다. 안경은 너무도 깨끗했고, 필자 눈의 나이가 문제였다. 필자보다 몇 살 적은 아내가 몇 년 전 필자가 겪은 일을 요즘 하는 것을 보며 입가에 빙그레 웃음이 폈지만, 실망할 아내 얼굴이 그려져서 그때 선배 교수처럼 노안 때문이라고 말해주지는 않았다.
‘올드 보이’는 원인 모르게 15년간 감금됐다가 사회로 돌아온 최민식(영화 속 오대수) 씨가 미스터리를 풀어나가는 과정을 잘 그린 영화로 평가받는다. 올드 보이는 남자 중·고교 재학생인 영 보이(YB)에 반대되는 졸업생(OB)이라는 뜻으로도 쓰이고, 나이 들어 한물간 사람을 빗대기도 한다. 영화 제목으로서 올드 보이는 아마 15년이라는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어느덧 중년이 되어 나타난 주인공 남자를 뜻하는 것이리라.
늙어가고 있는지 인식조차 못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노안이 와서 자신의 늙음을 인식하게 된 필자와 아내 모두 올드 보이 최민식 씨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통적 유교적 사고를 기반으로 하는 우리 사회에서는 노인을 공경하는 미풍양속이 있지만 고령사회가 되면서 법적으로 노인 대우를 받는 65세가 되어도 노인 시설에 가면 아직 어린애 취급을 받는다 하니 그 정도에 아직 달하지 않은 나이로는 올드 보이라고 하기에 어림도 없다는 시각이 있어 한편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아마도 미래에 여지없이 올드 보이라는 작위를 받게 될 테니 필자 또래 중년 남녀는 항상 긴장해야 하리라.
우리 정서상 올드는 곧 노인으로 받아들인다. 만 65세 이상인 노인 인구가 전체 인구의 7% 이상이면 고령화사회, 14% 이상이면 고령사회라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2017년 고령사회로 진입했고, 2025년이면 노인 인구가 20% 이상이 되는 초고령사회로 진입하게 될 것이라 한다. 아내 또한 마찬가지다. 지금부터 5년 뒤에는 10명 중 2명이 올드인 사회가 된다니 솔직히 좀 무섭다는 생각도 든다. 극단적으로 하나만 생각해보자. 현재 지하철이나 버스에 올랐을 때 노인 우대석이 14% 이상 되는가? 머지 않은 미래에 20% 이상으로 늘릴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렇지 않다 보니 노인들 자체 경쟁이 치열하다. 결국 올드들은 자연스럽게 일반인 쪽으로 밀려와 젊어 보이는 이들에게 올드로서 주장을 하게 된다. 아무리 젊었다지만 하루 내내 일이나 공부를 한 후 곤한 몸을 이끌고 귀가하다 보면 피곤이 몰려오고, 빈자리가 있으면 앉아 가고 싶은 게 인지상정 아닌가? 그런 그들에게 올드들은 무언으로 자리 양보를 압박한다. 이렇게 해서 생기는 갈등은 사회 전반으로 확산돼 새 문제로 비화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얼마 전 TV에서 내년 총선 출마를 채비하는 전직 국회위원들, 즉 올드 보이들이 더 젊은 이미지를 배워 와 여기저기 다닌다는 뉴스를 봤다. 또, 오랜 기간 등장하지 않던 코미디언들이 어느 날부턴가 10년 이상 후배들과 같은 프로그램에 등장하고, 수십 년 전 활동하던 가수들 역시 이런저런 프로그램을 통해 모습을 보인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이니 누가, 언제, 무슨 일을 하든지 본인 스스로 결정할 문제지만 올드라는 이유만으로 대우받거나 뭔가 거저 얻어질 것으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우리 사회는 올드에 대한 맹목적 존경심이 없어진 지 오래됐고, 올드들 또한 이미 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존재가 됐다. 그들에 대한 적절한 사회복지 서비스는 마땅히 이루어져야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젊은이와 치열하게 경쟁해서 당당히 대우받는, 그런 건강한 올드 보이의 세상이 되길 기대해본다.
부산가톨릭대 소프트웨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