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커가 다시 돌아왔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하얀 얼굴과 귀밑까지 치켜 올라간 핏빛 입술과 함께. 지난달 초순 국내에서 개봉된 이후 누적 관객 수 500만 명을 넘어선 토드 필립스 감독의 영화 ‘조커’는 기존 할리우드 영화가 만들어 낸 악의 화신 조커의 모습에 입체감과 설득력을 부여한다.
알려진 대로 조커는 미국 DC코믹스 ‘배트맨’ 시리즈에 등장하는 악당이다. 배트맨이 고담시를 지키는 선과 정의의 아이콘이라면 조커는 악과 광기의 화신이다. 팀 버튼의 ‘배트맨’(1990)에서 잭 니콜슨이 연기한 조커나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2008)에서 히스 레저가 연기한 조커의 모습은 충실히 이런 구조를 따른다.
올해에 등장한 ‘조커’는 이제까지 한 번도 시도된 적 없는 악당 조커의 ‘탄생’에 초점을 맞춘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악당으로의 ‘변모’를 다루고 있다. 그 시작은 고담시의 평범한 광대 아서 플렉으로부터 비롯된다. 망상에 사로잡힌 노모와 단둘이 살며 미래의 코미디언을 꿈꾸는 그에게 하루하루를 버티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광대 분장으로 가게 홍보를 하다 십대 청소년들에게 몰매를 맞기도 하고 동료가 준 총을 몸에 지닌 채 일하다 발각돼 일자리가 끊긴다. 어릴 때 당한 폭력으로 뇌를 다친 그는 현실과 망상 세계를 오가고 수시로 터져 나오는 제어불능의 웃음으로 오해를 산다. 주기적으로 받던 극빈층 대상 정신과 무료상담 역시 예산 삭감으로 중단될 형편이다.
영화 전반부에서 아서 플렉이 처한 출구 없는 암울한 현실은 관객을 힘들게 한다. 조커 역을 위해 체중을 23kg이나 뺀 호아킨 피닉스의 깡마른 몸과 공허한 표정, 예기치 않게 터져 나오는 발작적인 웃음 역시 한몫한다. 하지만 후반부 지하철에서의 우발적인 살인 이후 그는 완전히 변모한다. 자신을 억누르던 모든 억압에서 기꺼이 자유로워지고자 한 것이다. 화려한 양복 차림으로 춤을 추며 계단을 내려오는 그의 모습에선 이제 더는 위태롭고 우울하던 아서의 모습은 없다. 악당 조커의 탄생이다.
나아가 조커의 존재는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된 고담시에 폭동을 불러일으키는 기폭제 역할을 한다. 영화의 말미 아서가 자신의 생물학적 아버지이자 고담시의 거물 토마스 웨인을 살해하는 장면은 영화 ‘조커’의 종결부이자 ‘배트맨’ 시리즈의 시작을 알린다. 부모의 죽음을 목격한 어린 브루스 웨인이 곧 미래의 배트맨이기 때문이다.
영화 ‘조커’는 평범한 인물에서 조커라는 희대의 악당으로 변모하는 입체적 주인공을 다룬다는 점에서 이제까지 나온 DC코믹스나 마블 시리즈의 영화와는 다르다. DC코믹스의 슈퍼맨이나 배트맨, 마블 시리즈의 아이언 맨, 토르, 캡틴 아메리카, 헐크 등은 강력한 힘과 빼어난 능력의 소유자들이다. 다양한 초능력을 지닌 그들은 선과 정의를 대변하며, 혼자서 또는 ‘어벤져스’라는 이름으로 함께 뭉쳐서 악과 불의에서 미국과 인류를 구원해 왔다.
토드 필립스 감독은 영국의 영화 전문 TV 채널인 ‘필름 4’와의 인터뷰에서 DC나 마블 시리즈의 슈퍼 히어로 영화가 한 장르로 자리 잡았음을 인정한다. 그는 거대 자본을 바탕으로 과도한 CG 장면과 스펙터클로 가득 찬 이 영화들이 마치 “같은 천에서 잘라낸” 판박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이와는 달리 한 인물을 집중적으로 탐구하는 “핸드메이드 영화”를 지향하며, 그러한 방식으로 만든 영화가 바로 ‘조커’이다.
평범한 광대 아서 플렉이 희대의 악당 조커로 거듭나는 과정은 토드 필립스의 완벽에 가까운 연출과 호아킨 피닉스의 열연으로 강한 설득력을 얻는다. 고담시 모습 또한 관객의 공감도를 높인다. 영화 곳곳에서 드러나는 극심한 빈부 격차나 소외계층을 지원하는 사회적 안전망의 미비, 그리고 이로 인해 벌어지는 집단 시위와 폭동 등은 여전히 지구촌 곳곳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고담시는 단순히 ‘허구적’인 장소가 아니라 현실을 반영한다. 시민들의 목소리보다는 자신의 정치적 야망에 집중하는 토마스 웨인이 화려한 정장 차림으로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스’를 관람하는 장면은 아이러니의 극치이다.
‘조커’는 지난 8월 말에 개최된 베니스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DC코믹스의 인물을 소재로 한 영화가 유수의 국제영화제에서 작품상을 수상한 것은 처음이다. 사회적 불평등과 미비한 사회적 안전망을 소재로 다룬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과 동일한 맥락에 놓인다. 견고한 자본주의의 구조에 균열을 내기 위해 봉 감독이 기생과 공생의 방식을 선택했다면, 토드 필립스는 좀 더 직접적으로 조커라는 반영웅을 출현시킨다. 절대 악의 화신 조커가 아니라 출구 없는 도시 빈민 아서 플렉으로부터 어느덧 악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조커의 변신이 슬픈 이유이다.
동서대 영어학과 교수·민석도서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