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이 끝난 지 6년여가 지난 1605년 3월, 사명대사(1544∼1610)는 일본 에도(도쿄)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났다. 강화와 조선인 포로 송환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이에야스는 협상에 앞서 한시를 한 수 읊었다. ‘돌에는 풀이 나기 어렵고/방 안에는 구름이 일어나기 어렵다/너는 도대체 어느 산에 사는 새이길래/봉황의 무리 속에 끼어들었는가’. 그는 자신을 봉황에, 대사를 산새에 비유하면서 기선 제압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러나 대사는 이에 굴하지 않고 태연히 이에야스에게 답시를 건넸다. ‘나는 본디 청산에 사는 학인지라/늘 오색구름을 타고 노닐었다/어느 날 갑자기 구름이 사라지는 바람에/잘못하여 닭 무리 속에 떨어졌노라’. 오히려 스스로를 학으로 높이고, 이에야스를 닭으로 깎아내리면서 담대한 기개를 과시했다. 그 덕분인지 대사는 협상을 성공리에 매듭짓고 3000여 포로와 함께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다.
대사는 난세를 산 탓에 뜻하지 않게 승병장이 되었지만, 빼어난 선승이자 시인이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활로에서 머뭇거려선 안 되네/곧바로 가다보면 비로소 그칠 곳에 이르리라/만물을 비추어 보면 텅 비어서 머물 곳이 없고/기틀을 되돌려 고요히 살피면 나아갈 곳이 있네’. 대사가 일본 승려에게 써준 선시에서도 그 면모가 잘 드러난다. ‘사명당대사집’의 서문을 쓴 허균(1569~1618)은 “대사의 선시는 뜻이 맑고 격조가 높다. 그는 족히 당나라의 아홉 승려와 비교할 만하다”고 평하기도 했다.
대사의 5대 법손인 남봉선사는 1738년 대사의 공적을 기리고자 비석을 세웠다. 대사의 고향인 경남 밀양시 무안면에 있는 표충비(사명대사비)가 그것이다. 이 비석은 동학농민운동, 3·1운동, 8·15해방, 6·25전쟁, 4·19혁명, IMF환란 등 역사의 고비마다 땀을 흘린 것으로 유명하다. 지난 18일 오전, 표충비가 또 땀을 흘렸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배상 문제로 인해 해방 이후 최악의 상태로 전락한 한일관계를 대사는 아는 걸까.
전문가들은 표충비의 땀을 기후 변화나 결로 현상 등으로 분석한다. 당연한 분석이지만, 땀을 ‘사명대사의 충혼’으로 해석하는 설화에 귀가 솔깃해진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의 존폐를 둘러싼 미국과의 이견 때문에 동북아 안보 문제로까지 번진 작금의 사태가 자못 심각해서다. 탁월한 외교관이기도 했던 대사라면 이 위기에 어떻게 대처할까. 머리 숙여 선현의 지혜를 구해야 할 때다.
이경식 논설위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