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온 한 해가 저물어간다’는 말은 새해가 이어온다는 뜻을 숨기고 있다. 세상만사는 언제나 두 개의 얼굴을 지닌다. 그러니 그가 누구든, 무엇이 되었든, 함부로 속단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편견으로 차별하고 이기심만으로 혐오한다.
성경 속 노아 이야기에도 차별이 숨어 있다. 유일한 선인으로 선택받은 노아는 방주에 올라 홀로 구원받았다. 그는 동물을 학대하고 함부로 살상하던 육식주의자에 비하면 채식주의자나 생태주의자에 가깝고 동물을 사랑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포도밭 경작의 창시자로도 전해진다. 그러나 노아가 구원받은 이후 만취해 잘못을 저지르기도 했다는 것이나, 지혜의 아이콘으로 각인된 솔로몬이 깊은 허무의 늪에 빠진 것에 대해서는 덜 알려져 있다. 신화가 가르치기 위해 만들어졌듯이, 성경 속 노아 이야기도 그렇다. 벌거벗은 아비의 몸을 보지 않고 가려준 두 아들은 복을 누렸지만, 조롱하듯 떠벌리기만 한 큰아들은 자자손손 큰 벌을 받았는데 그가 아시아인의 선조임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민족을 타자로 만드는, 극명한 차별의식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역사 속 수많은 분쟁의 이면에는 이렇듯 편견과 차별의식에서 기인한 혐오가 유혈이 낭자한 비극을 양산하고 있다.
국민장을 했다는 마한의 여성 부족장 무덤이 발굴되었을 때, ‘파리구더기와 함께 발견된 여성’으로 표기한 것을 보았다. ‘파리구더기’만 강조하여 꼭 그리 적어야 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소설 ‘82년생 김지영’에 대한 이견도 그런 차이로 시작된다. 남성의 무의식 속에 자리한 여성이라는 차별적 존재에 대한 분노를 목격할 때면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이 떠오르곤 한다. 성폭행 당한 딸 때문에 술을 마시며 울던 아버지가 몸과 마음을 다친 딸에게 심한 매질을 하다가 결국 정신병원에 감금시키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훼손된 물건이니 내 집에 둘 수는 없다는 것이 그가 가진 여성에 대한 차별적 시선과 혐오의 명분이었다. 중학생이었던 내 눈에는 참으로 불가해한 세상이었다. 고등학생이 되어 카프카의 ‘심판’을 읽었을 때에도 이웃집의 그 처참했던 비극이 아프게 떠올랐다.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삶은 수많은 선택으로 이뤄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최소한의 토대가 되고 잣대가 될 수 있는 인성 교육이 필요한 것이다. 우수한 유전자를 지닌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인성 교육이 제대로 됐더라면 한 해에 1000명에 육박하는 노동자가 귀가하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는 현실이나, 비수 같은 악성 댓글로 인한 자살을 잇따라 봐야 하는 참담한 현실도 조금은 달라졌을 테니까 말이다.
삶에 대한 성찰과 체득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면, 최소한 민생 법안을 가지고 정치적 손익만을 따지는 정치인을 양산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는 매연을 뿜어내는 고급승용차만 타는 이들이 입으로는 대기오염의 심각성에 대해 분개하지만 정작 본인은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는 것과 같다. 바르게 보고 바르게 행동하지 않아 벌어지는 참극은 너무나 많다. 일상 속에서 반복되는 그런 이기심은 차별과 혐오를 잉태하고 반복과 질시만을 양산한다.
이른바 ‘미투’ 법안 34건 중 6건만이 통과되었다는 사실, 통과율 17%라는 수치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무고한 시민을 억울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이 배제의 이유였다. 하지만, 무고한 시민 속에 참혹한 피해를 입은 여성은 두지 않겠다는 차별적 시선에서 기인된 혐오가 모든 화해와 소통을 막는다. 지난 10년 동안 여성 인권 단체는 여성연예인 인권보호 법제화를 위해 노력했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음으로 희생되어야 길이 보일까. 과연 보다 나은 방향으로의 희망은 있는가. 2019년의 우리는 참담함과 공허함 속에서 또 한 해를 떠나보내고 있다.
절망을 보려면 용기가 필요하다는 말을 하지만 우리는 용기가 없어도 그저 눈앞에 닥친 현실 앞에서 절망이라는 말 외에는 할 말이 없다. 영화 ‘히틀러’에 나오는 대사에서도 그랬듯 악이 지배하는 세상의 필요한 유일한 조건은 선한 자들의 나약함과 수수방관이다. 우리는 선한 자들이라 자처하며 모든 참극을 수수방관한다. 성폭행을 당한 유치원생의 모습을 보면서도 범죄자가 내 자식이기만 하면 후안무치가 되어도 좋다는 이기심과 몰지각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니체는 삶의 이유를 아는 사람은 삶의 방식은 어떻게든 견딜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출구 없는 현실에서 삶의 이유를 어디에서 무슨 수로 찾아야 할지 암담하기만 하다. 그렇지만, 그렇기에, 우리는 희망을 품어야 한다. 적우침주(積羽沈舟), 작은 깃털이 어떻게 배를 가라앉힐 수가 있을까마는 그럴 수 있다는 실낱 같은 희망으로 나만을 위해 산다는 것의 의미 없음을 자각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만 한다.
동의대 교수·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