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소설가 길남 씨는 PC방에 와 있다. 2시간 동안 쓴 원고가 ‘비회원님, PC 시간 종료시간입니다’는 컴퓨터의 코멘트와 함께 모조리 날아간 순간이다. 멘붕에 빠진 길남 씨는 시계를 쳐다본다. 이미 원고 마감 시간이 지났다. 그는 대체 이곳에서 뭘 하고 있는 것인가?
길남 씨는 오늘 아침 극도의 우울에 빠져 있었다. 일요일 아침 출근을 위해 차의 시동을 걸던 그의 머릿속은 내일까지 보내야 할 칼럼을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고민과 온몸의 균형을 방해하는 허리·갈비뼈 통증과 전날 과로로 고생한 아내의 신음소리와 오늘 바비큐 통족발은 몇 개를 해야 하나…? 뭐, 이런 걸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우울을 견디다 못해 SNS에 이런 글을 남겼다.
“믿음이 흔들릴 때마다 찾아오는 우울을 이겨내야 한다… 주저앉을 수는 없다. 눈앞에 있는 것부터 헤쳐나가야 한다. 세상에 천명한 것처럼 하하하 웃으며….”
소설가도 이런 글을 남기는 것이 자기 위안이란 걸 잘 안다. 하지만 이런 글이라도 끄적여 남겨놓지 않으면 하루 시작의 발걸음마저 뗄 수 없을 것 같다. 새로운 책을 낸 지 한 달. 지역의 이름도 없는 소설가가, 지역의 신생 출판사에서, 지역의 이야기를 썼으니 무관심은 당연한 결과다. 게다가 책이라고는 쳐다보지도 않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그렇다. 길남 씨는 출간 우울증에 걸린 것이다. 이제 이 정도 무관심에는 익숙해질 때도 됐건만 허허허….
출근길이 시작된다. 차가 광안대교를 오른다. 토펠리우스 동화에 나온 태양의 금가루가 온 바다를 메우며 반짝인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바다를 향해 고함을 질러댄다. “힘을 주소서, 힘을 주소서! 열심히 하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아!” 무슨 힘을 달라는 건지 뭘 열심히 한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바다의 신 아트라에게 외친 기원은 창문으로 솔솔 새어 나가고, 백미러에는 초췌한 소설가만 비칠 뿐이다. 마트에 도착한 길남 씨.
일요일은 바쁘니까 오븐에 서둘러 족발을 넣으라는 즉석조리실 여사님 말에 정신이 살짝 든다. 순대 넣고 족발 꺼내고 소스 바르고 익힌 순대·족발 썰고 포장하고…, 이상한 손님의 이상한 주문대로 썰던 순대를 이상한 핑계로 팔지 못하고는 포장해 진열대에 놓는 순간 울리는 전화 한 통! “배 작가 원고가 아직 안 와서. 마감이 어제까지인데.”
눈앞이 하얗게 되어버린 소설가의 손이 덜덜 떨린다. 아니, 원고 마감이 어제? 그의 스케줄 표에는 분명 내일로 돼 있던 마감일이건만, 원고 청탁 문자에는 분명 어제로 명시돼 있다.
전화기를 든 채 고개를 90도로 숙이며 몇 시간 여지를 겨우 얻은 길남 씨는 뒤를 돌아본다. 어지러이 널린 순대와 족발 사이로 텅 빈 진열대. 잠시 머뭇거리는 그의 귓속으로 쓰다 만 장편소설의 주인공 전성칠 씨가 속삭인다. “일단 눈앞에 있는 것부터 처리하는 거야.”
소설가의 몸이 잽싸게 그 충고를 받아들이더니 이제 날아다니기 시작한다. 꼭 이럴 때일수록 손님이 몰려온다. 관계없다. 각성한 길남 씨! 순대! 바비큐! 불족이고!…, 세 시간 걸려 처리할 일이 단 한 시간에 사라져 버린다.
온몸이 뻐근한 가운데에서도 정신은 벌써 키보드 앞에 있는 듯하다. 가슴이 외친다. 글 쓰고 싶다. 글을 쓰고 싶다! 근처 PC방으로 달려간 길남 씨는 온몸 땀구멍으로 원고 내용이 줄줄 흘러나오는 걸 느낀다. “한글, 한글 프로그램 있는 컴퓨터요!” PC방 알바가 화들짝 놀랄 만큼 고함을 지른 길남 씨, 컴퓨터 앞에 앉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드디어 원고가 완성된 순간이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일인가? “PC 시간 종료시간입니다”라는 알림과 함께 컴퓨터가 꺼지며 ‘사라진 원고’가 된 이 상황은…. 1시간 만에 완성했던 원고는 사라졌고, 그 20분 뒤 길남 씨 머릿속에서 복원된 원고가 지금 여러분 앞에 있는 이 글이다.
그래, 눈앞에 있는 것부터 처리하는 거야! 우울? 웃기고 있네. 잠시 키득거린 길남 씨는 오래 비운 족발 코너로 뛴다. 달려가며 하하하! 웃을지도 모를 일이다.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