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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과 법률] 공무원 필수과목 ‘영어’는 국가폭력 /천정환

  •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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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9-12-18 19:37:11
  •  |  본지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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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정부는 2020년 공직시험과목 개편안을 발표했다. 9급 시험과목이었던 사회나 수학은 전문 과목으로 대체했으면서도 영어는 여전히 필수과목으로 생존했다. 영어를 모든 공직시험에 필수과목으로 정한 국가 정책은 ‘상징 폭력’이자 수험생의 공무담임권을 침해하고 만족스러운 서비스를 받을 권리가 있는 국민의 기본권을 해칠 수 있다.
그림 서상균
상징 폭력에는 ‘현모양처’처럼 모두가 아는 상징 폭력과 누구도 의식하지 않는(또는 모르는) 상징 폭력으로 나뉜다. 후자가 위험한 이유는 가해자는 물론 피해자도 상징 폭력에 가담해 하나의 신념으로 자리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영어가 공직시험의 변별력을 좌우하는 기준이자 소양과목인 것이 그 예시다.

정부는 해방 이후 높은 문맹률이 문제가 되자 ‘공무원은 소양이 있어야 한다’는 이유로 임용기준에 소양을 넣었다. 정부는 또 세계화 정책의 하나로 교육과정에서 영어를 강조했다. 나아가 모든 공직시험에 영어를 ‘소양 과목’으로 채택했다. 이제 영어는 취업·승진·입시뿐 아니라 사람의 능력을 평가하는 절대 권력으로 자리 잡았다. 물론 세계화와 영어 교육은 중요하다. 그러나 ‘영어’가 공직자를 선발하는 중요 기준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제대로 공론화된 적이 없다.

과연 공직자의 소양과 영어 실력의 연관성은 높은가. 결코 ‘아니다’고 생각한다. 현대행정에서 공무원 소양은 인성·인권감수성·봉사정신과 연관성이 높다. 영어실력과는 무관하다. 영어와 공직 업무의 생산성(시험의 타당도) 역시 연관성이 낮다. 가령 외교직은 영어가 필수이나 교정·경찰·사회복지·기술·행정직 업무에 영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교정직은 교화전문성과 교화지향적 인성이 있으면 되고 사회복지직은 약자에 대한 감수성과 전문성이 높아야 한다.

이제는 소양을 서비스를 받는 국민 후생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 영어실력이 복지 수급자의 후생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영어는 대부분의 공직수행에 아무 연관성이 없다. 단지 공무원 자신의 개인적 스펙에 지나지 않는다.

영어 성적의 변별력이 크면 강한 전문성과 인본성을 구비한 수험생이 공직에서 배제될 수 있다. 실제로 ‘영어 강자’의 합격률이 높은건 다 아는 사실 아닌가. 이는 공직의 관료화를 촉진시키고 적절한 서비스를 받아야 하는 국민의 후생을 저하시킨다. 가령 영어는 잘하는데 농업에 대한 전문성이나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공무원이 선발된다면 농민은 제대로 된 서비스를 받을 수 없다.

개발행정시대에는 능률성이 중요했다. 이때 국민은 하나의 집단으로 간주되어 단순한 행정서비스만 제공해도 됐다. 그러나 사회적 형평성이 중요해진 복지행정시대에는 수요자의 욕구가 복잡해졌다. 행정 역시 다품종 소량생산으로 패러다임 전환이 진행 중이다. 결국 전문성과 인권 감수성으로 무장한 사람이 입직해야 다양한 계층의 욕구에 부합하는 서비스 공급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반면 우리나라 공직 입문은 여전히 개발시대의 임용 과목인 영어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

선진국 중 영어를 모든 공직시험에서 필수과목으로 하는 나라는 없다. 선진국은 공직의 특성에 따라 시험과목과 응시자격·정년도 달리한다. 가령 캐나다는 다양한 경험과 원숙함을 갖춘 교정직을 선발하기 위해 70세 이상에게도 응시의 문을 열었다. 모든 직종에 동일한 인사기준을 적용 중인 우리나라와는 다르다.

결론적으로 영어가 반드시 필요한 일부 직종(외교직)을 제외하고는 공직시험과목에서 영어를 폐지하거나 선택과목으로 돌리자고 제안한다. 문맹률이 높은 시대의 산물인 ‘소양’ 대신 ‘봉사정신을’을 평가하는 과목을 신설하는 것도 필요하다. 나아가 형식적 평등주의에 매몰되어 직종 특성과 관계없이 동일한 응시연령·정년·필기시험 방식을 적용한 인사정책은 실질적 평등과 민주주의를 저해하고 관료화를 촉진하므로 개혁해야 한다. 영어의 ‘상징 폭력’에 깊이 잠든 한국사회에서 이제부터라도 문제의 쟁점을 부각시켜 공론화할 필요가 있다.

동서대 경찰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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