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9월 15일 낮 12시50분에 고상돈 대원의 떨리는 목소리가 베이스캠프의 무전기에서 흘러나왔다. “여기는 정상, 더 이상 오를 데가 없다.” 해발 8848m 세계의 최고봉 에베레스트에 우리나라 산악인이 처음 발을 디딘 순간이었다. 에베레스트 등정은 산악 후진국이자 개발도상국이던 한국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원정대장을 맡았던 김영도 대한산악연맹 고문이 ‘감히 꿈꿀 수도 없는 일’이라고 회고할 정도로 어려운 여건을 딛고 이뤄낸 일이었다. 히말라야 고산 원정은 당시 선진국들의 독무대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상황에서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에 불과한 나라가 세계 8번째로 최고봉에 오른 것이다. 이후 한국은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고산 등반에 뛰어들어 ‘히말라야 14좌 완등’ 산악인을 가장 많이 배출한 국가가 됐다.
이처럼 감히 꿈꿀 수도 없던 일, 세계 최고봉에 고상돈이 올라설 수 있었던 건 대원 18명 모두의 땀과 노력, 희생이라는 발판 덕분이었다. 김영도 원정대장과 장문삼 등반대장, 박상열 부대장에 이어 20·30대의 패기 넘치는 젊은 산악인들이 제각각 역할을 분담해 정상 등정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부산지역 산악인인 곽수웅과 전명찬도 있었다.
부산 산악계에는 신업재 성산 오점량 등 지역 산악운동의 초석을 다지고 발전을 이끈 산악인이 한둘이 아니다. 이 가운데서도 곽수웅과 전명찬은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일원으로 참여한 것만으로도 그 당시의 지역 산악계에서 특출난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원정대의 막내였던 전명찬(당시 25세)은 식량 담당을 맡아 등정 성공의 밑거름이 됐다. 그는 지병인 간경화를 이겨내지 못하고 1994년 42세의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곽수웅은 수송을 맡아 100여 일에 걸친 대장정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지금은 상상조차 되지 않지만 1977년 한국 원정대가 에베레스트에 도전할 때 부산에서 선박 편으로 인도 캘커타(지금의 콜카타)로 실어 보낸 물품은 알루미늄 사다리 100개와 텐트 30동, 100여 일 동안 먹을 식량 등 총 18t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물량이었다. 처음 나선 원정에서 이 물자들을 간수하고 적절하게 배분하는 중책을 곽수웅은 김병찬과 함께 맡아 차질없이 해냈다.
170㎝가 채 되지 않는 키에 힘이 장사였던 곽수웅은 부산 산악계의 작은 거인으로 불렸다. 성산 선생의 인도로 대륙산악회를 통해 산에 입문한 뒤 타고난 체력과 강단으로 전국의 산하를 누볐다. 그런데 곽수웅은 에베레스트 원정보다도 영남알프스라는 이름의 명명자로서, 영산 지리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비경을 간직한 칠선계곡 등산로의 개척자로서 지역사회에 더욱 큰 영향을 미쳤다.
부울경 지역에서 가끔이라도 산에 다니는 사람 치고 영남알프스를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이 친숙한 이름을 지역 사람들에게 선사한 이가 바로 곽수웅과 성산 선생이다. 두 사람은 대륙산악회 소속으로 1971년 일본 북알프스 원정을 다녀온 뒤 사자평 고사리마을을 찾아 술잔을 기울이다가 문득 의기투합해 첩첩이 둘러싼 1000m대의 산군에 영남알프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처음에 산악인들끼리 부르던 이름이 차츰 퍼져 이제는 누구에게나 익숙해진 고유명사가 됐다. 칠선계곡 개척 등반도 마찬가지다. 곽수웅은 1964년 ‘지리산 칠선계곡 루트 개척 및 학술조사대’에 참가해 칠선계곡 등산로를 개척했고 그해 겨울에는 지리산 주요 등산로에 표지판을 설치하는 일도 했다. 지역 산악인은 물론 시민이 가장 사랑하는 영남알프스와 지리산 모두에 그의 손길이 닿은 것이다.
부산 등산 역사의 증인인 곽수웅 선생이 지난 15일 영면했다. 무릎 관절이 좋지 않아 고생하면서도 근교의 산을 틈틈이 찾았다는 그는 지역 산악계의 원로로서 후배 산악인들에게 따끔한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 선후배와 어울려 기울이던 술잔도 더는 들 수 없게 됐다. 부산 산악계, 나아가 한국 산악계를 풍미했던 산악인이 또 한 명 무대 뒤로 물러나면서 한 시대가 점점 더 희미해지는 듯하다.
생활레포츠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