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한 해 한일 관계는 갈등의 연속이었다. 위안부 문제와 강제동원 문제를 위시한 역사 갈등에 더해 일본 정부의 경제 보복 조치로 인해 한일 간에 유례없는 경제전쟁까지 벌어졌던 탓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소미아’ 즉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의 유예 결정으로 안보 갈등마저 더해졌다. 한일 관계가 이렇게 역사 갈등, 경제전쟁, 안보 갈등 등 다차원적인 갈등 관계를 보인 것은 전에 없던 일이었다.
불행 중 다행스러운 일은 지난해 연말에 접어들어 경제전쟁이 한풀 꺾이는 분위기로 변하였고, 두 정부 간 대화 무드가 조성됐다는 점이다. 지난해 10월 우리 총리의 일본 방문이 있었고 국회의장의 방일도 이어졌다. 한편, 우리 정부는 끈질기게 경제 보복조치를 철회할 것을 일본 정부에 요구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지소미아를 연장하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단호하게 밝혔다. 지소미아 카드는 미국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결국, 일본 정부는 수출규제에 대한 국장급 정책대화를 열기로 했고, 우리 정부는 병행적으로 지소미아 종료 결정을 조건부로 유예하기로 했다. 갈등의 지속이 양국 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 아래 대화·외교만이 유일한 출구라는 인식이 두 정부를 대화 테이블에 앉게 만들었다. 이 같은 양측의 노력 결과 지난달 25일 중국 청두에서 열린 한·중·일 3국 정상회의를 계기로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총리가 만나 한일 정상회담을 열게 되었던 것이다. 2018년 9월 이후 15개월 만의 한일 정상회담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모두 발언을 통해 양국 간 현안을 해결하려면 직접 만나서 솔직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면서 대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아베 총리도 이에 화답했다.
회담에서 문 대통령은 한일 관계를 “잠시 불편함이 있어도 결코 멀어질 수 있는 사이가 아니다”고 규정했다. 한·중·일 3국 정상회의 연설에서 이 삼국관계를 ‘운명공동체’라고 말한 문 대통령의 또 다른 발언과 연관 지어 생각해보면 매우 의미심장한 말이라 하겠다.
2020년 새해 벽두에 생각해보는 한일 관계 역시 바로 이 문제로 귀착된다. 한일 관계에서 ‘불편함’이란 어디서 오고 ‘멀어질 수 없는 사이’란 어떻게 유지·발전시켜나갈 수 있는가? 한일 관계를 걱정하는 양국의 정부와 국민은 이 질문을 지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불편함이란 과거 한반도에 대한 일제의 식민 지배로부터 이어지는 여러 가지 과거사 문제로 인해 끊임없이 생겨나고 재생산된다. 불편함은 과거사에서 파생되는데, 그것은 시기에 따라 이슈가 달라지는 특징이 있다. 어떤 시기에는 교과서 문제이다가 야스쿠니 신사이다가 하는 식으로 발현되는 모양이 달랐다. 지금 시기는 위안부 문제와 징용 문제가 불편함의 근원이 되고 있다.
과거는 지울 수도 망각해버릴 수도 없다. 이제 시간이 충분히 흘렀으니 그만할 때가 되지 않았나, 후손에게 이런 골치 아픈 문제를 물려주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입장이 존재한다. 그럴싸하게 들리지만, 역사 인식의 결핍에서 비롯되는 입장이다. 박근혜 정부에서 일어난 2015년 12월 ‘한일 위안부 합의’에서 “최종적·불가역적으로” 해결되었다고 한 규정은 이런 인식을 잘 드러내준다. 그리고 이 인식은 일본 정부에만 있는 게 아니라 한국의 엘리트층에도 위력을 떨치고 있다.
20년도 전인 1998년 10월 김대중 대통령은 일본 의회 연설에서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 구축을 제안하면서 “일본은 과거를 직시하고 역사를 두렵게 여기는 진정한 용기가 필요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과거는 대충 정리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는 말이 아니라, 과거를 직시하는 가운데 경제·문화 및 인적 교류 등 분야에서 실질적 협력을 넓혀가자는 방향을 제시했던 것이다.
이후 역사 직시와 미래지향적 협력이라는 두 과제를 담은 우리 정부의 대일외교 기조가 수립됐다. 이른바 ‘투 트랙 외교’ 기조다. 문재인 정부의 대일외교도 ‘투 트랙’ 기조에 서 있으며, 이에 대해 문 대통령은 기회 있을 때마다 일본 정부에 대해서도 우리 국민에게도 이 기조를 밝혀 왔다. 첫 번째 트랙이 과거를 직시하면서 지혜를 모아 극복의 노력을 기울이는 과제라면, 두 번째 트랙이 경제·문화 및 인적 교류 분야의 실질적 협력인데 바로 ‘멀어질 수 없는 사이’와 직결되는 과제다.
투 트랙 외교는 실제로 구사하기 매우 어렵다. 두 개 트랙을 가능한 한 분리해 관리해야 하는데, 쉽지 않다. 과거사 문제로 갈등이 발생하면 좌절감도 생기고 인내심도 고갈되기 마련이어서 실질적 분야의 협력을 깨버리고 싶은 욕구가 생겨나기 십상이다. 상대에 대한 인식도 오해할 수 있는 소지가 많아진다. 신뢰의 위기가 야기되기 좋은 토양이 된다. 지난해 일본 정부가 취한 경제보복 조치는 투 트랙외교기조를 훼손한 사례다.
청두에서 정상회담 후 지난해 연말 아베 총리가 일본 한 텔레비전에 나와 문 대통령을 두고 “매우 언행이 부드러운 신사”라 덕담을 하고 “더 자주 만날 수 있는 관계를 만들면 좋겠다”고 했다고 일본 언론이 전했다. 대화와 만남을 강조한 메시지로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올해 이 같은 대화와 만남을 중시하는 흐름이 이어져 투 트랙 외교 기조가 회복되기를 기원한다. 한일 두 정상은 이미 셔틀외교에 대해 합의한 바 있다. 한일관계를 복원하기 위한 왕도는 대화밖에 없고, 대화가운데 정상 대화가 가장 최상위에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번 여름 도쿄에서 올림픽이 열린다. 일본으로서는 국가적 대사라 할 이벤트다. 이웃 국가인 우리는 당연히 성공적 개최를 위해 지원을 다 해야 한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에 아베 총리가 참석했듯이 문 대통령이 도쿄올림픽에 참석하는 것은 당연지사일 것이다. 게다가 여자스피드스케이팅 결승전에서 이상화 선수와 고다이라 선수가 보여준 것과 같은 아름다운 풍경이 재연되어 한일 관계가 멀어질 수 없는 사이, 난관이 있어도 미래로 나아가는 사이임을 입증했으면 좋겠다.
경남대 교수·전 주일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