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객 여러분, 버스에서 내릴 때는 환승을 하지 않아도 교통카드를 꼭 찍어주세요!’
시내버스 안에 붙어 있는 이 문구를 보고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버스 이용 승객의 이동경로를 빅데이터로 수집해 노선 신설이나 조정에 활용하겠다는 좋은 의도인 것은 알겠다. 하지만 개인이 언제 어디서 버스를 타고 내리는지 ‘데이터’가 다 수집된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행정 당국은 이를 적극 장려한다. 여기에 참여하면, 추가로 요금 할인을 해주는 방법을 찾고 있다고 한다. 정보를 제공하지 않으면 혜택을 주지 않겠다는 말로도 다가온다.
모르는 사이에 빠져나가는 개인 정보는 어마어마하다. 휴대전화 앱을 하나 깔려면 위치부터 연락처, 통화내역까지 접근하겠다는 데 동의해야 한다. 이런 상황이니 최첨단 기술의 종착지인 빅데이터 산업은 가장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으로 각광받는다. 모든 것을 계량·수치화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렇게 수집한 정보로 실시간으로 소비자 상황을 분석하고 예측한다. 내 휴대전화와 컴퓨터에 뜨는 광고는 나조차 생각하지 못한 나를 분석하고 있다.
글로벌 테크 자이언트(Tech Giant) 기업 아마존은 기술과 데이터를 이용해 이용자를 0.1명 규모로 세그먼트(데이터를 기억할 때 최소 단위)한다니 개개인 단위가 아니라 그보다 더 잘게 나눠 고객을 관리·분석한다는 뜻이다. 지난주 미국에서 열린 세계 최대 가전박람회 ‘CES 2020’을 관통한 키워드는 결국엔 더 강력한 ‘디지털과 모바일’로 수렴된다. 인공지능, 5G, 네트워크, 빅데이터, 딥 러닝 등 4차 산업혁명의 핵심영역을 이용해 기존 산업 간 경계를 허문다. 그리고 이들을 급속히 ‘통합’하는 게 혁신의 핵심이다. VR(가상현실)에 이어 AR(증강현실)까지, 공간 개념도 디지털을 바탕으로 재정립해야 할지 모른다.
2020년 새해가 되니 역사에 가속도가 붙어 점점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는 것을 체감한다. 멀미가 날 정도인데, 발 딛고 있는 곳의 현실을 보니 역시 모든 것을 숫자로 판단하고 통계로 발표하고 그래프로 계량화하고 있다.
우리나라 건축법 제1조(목적)는 ‘건축물의 대지·구조·설비기준 및 용도 등을 정하여 건축물의 안전·기능·환경 및 미관을 향상시킴으로써 공공복리의 증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되어 있다. 프랑스 건축법 제1조는 ‘건축은 문화의 표현이다. 건축적 창조성, 건물의 품격, 주변 환경과의 조화, 자연적 경관, 도시 환경 및 건축 유산의 존중은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로 시작한다.
얼핏 보면 둘 다 공공복리, 공공이익을 위한 것이라 비슷해 보여도 시작이 다르다. 대지·구조·설비기준 및 용도 등을 정하는 것부터 다루는 건축(법)과 ‘건축은 문화의 표현’이라고 전제하고 시작하는 건축(법)이 과연 같겠는가. 수치와 데이터부터 깔고 시작하는 것과 문화적 관점으로 먼저 받아들이는 것의 결과는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예술과 문화는 수치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문화와 예술은 수치로 환산되는 유형의 것들을 빛나게 하는 무형의 바탕이다.
고대 로마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는 건축이 추구하는 기본 목표를 견고성(firmitas) 실용성(utilitas) 아름다움(venustas)이라고 했다. 이는 지금까지 구조·기능·미(美)라는 건축의 3요소로 이어지고 있다. 이에 비추면 우리는 여전히 구조와 기능에 방점이 찍혀 있다. 결국, 아름다움을 놓치기 십상이다. 건축에서 아름다움은 단순히 보기에 좋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건축 안에 예술과 인본주의를 구현하는 것을 포괄한다.
시대가 변해도 바뀌지 않은 진리는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이다. 고전도 당대에는 고전이 아니었듯, 문화란 축적되는 역사를 바탕으로 시대를 개성 있게 관통하는 트렌드 같은 것이다. 새로운 10년을 여는 2020년이다. 우리는 그동안 경험하지 못한 건축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초불확실성의 상황에서 삶과 세상을 계량·수치화하는 것을 넘어 담대하고 깊은 인문정신을 만나야 한다. 거기 새로운 길이 있을 것이다.
㈜상지엔지니어링 건축사사무소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