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화 끈을 단단히 묶고 현관을 나선다. 밀린 원고에 대한 걱정과 편집에 대한 고민을 잠시 접은 걸음이 가볍다. 멀쩡한 가게 안을 두고 한사코 도로에까지 나앉은 푸성귀들과 과일들, 그리고 변함없이 돌고 있는 미용실 사인등, 아직 문을 열지 않은 호프집을 지나며 골목길 일상들에게 안부를 전한다. ‘보행신호를 지키시오’라는 다소 강압적인 문구가 나를 가로막는다. 보행자의 무단횡단을 경계하는 말인 것은 알지만 좀 부드러운 어투면 안 될까 생각해 본다. 올망졸망한 가게와 담 낮은 집들에 ‘공가’ ‘접근금지’ ‘철거’라는 붉은 글씨가 흘러내린다. 이곳도 곧 아파트가 들어설 것이다.
그린 레일웨이(Green Rail Way) 입구에 이르니 잘 정돈된 산책로가 반갑다. 쭉쭉 세로로만 높이 뻗은 건물 사이로 이렇게 가로로 편안히 누운 길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린 레일웨이는 부산 해운대구 올림픽교차로에서 시작하여 동부산관광단지까지의 9.8㎞길이다. 철길을 걷어내고 연분홍빛 시멘트를 깐 산책로 왼편은 올려다보기도 힘든 고층 아파트의 연속이다. 오른편은 밀리다 풀리다를 반복하는 도로이다. 이 두 개의 문명 사이에 배롱나무가 잎을 다 떨구고도 의연히 서 있다. 찬 바람에도 진초록잎을 달고 있는 금목서와 가시나무, 붉은 열매가 반가운 먼나무, 그 아래로는 동백이 붉고 다정큼나무, 댕강나무, 회양목, 팔손이가 줄지어 서 있다. 마른 가지에서 웅크리며 초록을 예비하고 있든, 둥치에 초록물을 가지고 있든, 칼바람에 진초록으로 서 있든 초록은 힘이 있다. 세상을 정화하고 우리를 정화하니 초록은 힘이 세다. 동해남부선 폐선이 이렇게 초록으로 와 더없이 반갑고 고맙다.
점심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대형 음식점 환기구를 통해 흘러나오는 냄새는 여기가 도심의 한복판임을 환기시킨다. 몇 년 전 한창 이 길이 정비되던 때 이곳을 지난 적이 있다. 포클레인이 늙은 매화 두 그루를 쓰러뜨리고 있었다. 그 곁을 맴돌며 목청이 찢어질 듯 울고 있던 직박구리는 어디로 갔을까? 그 봄날 보았던 늙은 매화의 흰 눈물을 잊을 수가 없다. 흰 눈물을 싣고 기차는 떠나가고 나는 이 초록 철길에서 새로운 매화, 어린 매화를 만난다. 이들이 잘 자라면 직박구리가 되돌아 올 것이다.
왼편 아파트가 끝나는 지점에 야트막한 산이 나타난다. 흙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벽을 쌓고 그 위에 개나리를 심어 한겨울인데도 노란 물결이 해운대 파도 따라 출렁이는 것 같다. 구름이 모여 사는 마을, 이름이 예쁜 운촌이다. 이곳에 자리한 ‘운촌마을회관·경로당’은 많은 이야기와 지혜가 가득한 고서 같은 느낌이다. 부산기계공고를 지나면 ‘흰 꽃이 피는 놀이숲’이다. 말발도리, 백철쭉, 조팝나무 등 흰 꽃들이 5,6월이면 그믐밤에도 환하게 길을 밝혀 주리라.
집을 나선 지 한 시간여 만에 흙을 밟는다. 옛 해운대역사와 정거장 주변은 기차가 달리던 그 모습 그대로이다. 이곳을 상업화하느냐 공원화하느냐로 갈등을 빚고 있다고 한다. 십여 년 전 뉴욕을 방문했을 때 맨해튼의 심장부에 위치한 센트럴파크가 신선하게 다가왔다. 뉴요커들이 그곳에서 운동하고 사색하고 휴식하는 모습은 참 부러웠다. 이곳이 해운대의 도심공원으로 자리매김하리라 믿는다. 눈앞의 이익보다는 멀리 내다볼 수 있는 혜안이 이 도심에 공원을, 초록의 힘을 선사하리라 기대한다.
옛 해운대역사 부지로 들어서자 젊은이들이 한 방향으로 향한다. 나도 초록 철길에서 내린다. ‘대한민국 최고 골목길 대상’을 수상한 해리단길이다. 지역골목상권이 젊은이들에 의해 활성화되고 있다. 도시재생사업에 어찌 명암이 없겠는가? 해운대구가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방지를 위해 상생협력하고 있다고 하니 다행이다.
“흘려보낸 시간들이 등을 켜는 오후에는/다 식은 찻잔 앞에 브람스를 기다린다/오랜 날 철걱거리던 완행열차 타고 올//누군들 그리 쉽게 어둠을 넘을라고/따라온 파도소리 흔적을 뒤척인다/잊을 것 잊었는데도 보푸라기 성가신//지워진 듯 여운 남은 낡은 책장 펼쳐두면/가끔씩 돌려 읽다 끼룩끼룩 갈매기소리/풍경에 노을을 입힌 새소리도 젖었다//(전연희 ‘해리단길에서’)”
휴식과 문화가 어우러진 공간에 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 앉는다. 갈매기소리가 철길을 걸어 내 곁에 앉는다. 세로로 오르기만 하는 도시를 살아가는 내게 가로로 길게 누운 초록 철길이 준 휴식, 초록의 힘이 편안하고 달콤하다.
시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