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산메디클럽

[아침숲길] 초록의 힘 /정희경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20-01-16 18:54:44
  •  |   본지 25면
  • 글자 크기 
  • 글씨 크게
  • 글씨 작게
운동화 끈을 단단히 묶고 현관을 나선다. 밀린 원고에 대한 걱정과 편집에 대한 고민을 잠시 접은 걸음이 가볍다. 멀쩡한 가게 안을 두고 한사코 도로에까지 나앉은 푸성귀들과 과일들, 그리고 변함없이 돌고 있는 미용실 사인등, 아직 문을 열지 않은 호프집을 지나며 골목길 일상들에게 안부를 전한다. ‘보행신호를 지키시오’라는 다소 강압적인 문구가 나를 가로막는다. 보행자의 무단횡단을 경계하는 말인 것은 알지만 좀 부드러운 어투면 안 될까 생각해 본다. 올망졸망한 가게와 담 낮은 집들에 ‘공가’ ‘접근금지’ ‘철거’라는 붉은 글씨가 흘러내린다. 이곳도 곧 아파트가 들어설 것이다.

그린 레일웨이(Green Rail Way) 입구에 이르니 잘 정돈된 산책로가 반갑다. 쭉쭉 세로로만 높이 뻗은 건물 사이로 이렇게 가로로 편안히 누운 길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린 레일웨이는 부산 해운대구 올림픽교차로에서 시작하여 동부산관광단지까지의 9.8㎞길이다. 철길을 걷어내고 연분홍빛 시멘트를 깐 산책로 왼편은 올려다보기도 힘든 고층 아파트의 연속이다. 오른편은 밀리다 풀리다를 반복하는 도로이다. 이 두 개의 문명 사이에 배롱나무가 잎을 다 떨구고도 의연히 서 있다. 찬 바람에도 진초록잎을 달고 있는 금목서와 가시나무, 붉은 열매가 반가운 먼나무, 그 아래로는 동백이 붉고 다정큼나무, 댕강나무, 회양목, 팔손이가 줄지어 서 있다. 마른 가지에서 웅크리며 초록을 예비하고 있든, 둥치에 초록물을 가지고 있든, 칼바람에 진초록으로 서 있든 초록은 힘이 있다. 세상을 정화하고 우리를 정화하니 초록은 힘이 세다. 동해남부선 폐선이 이렇게 초록으로 와 더없이 반갑고 고맙다.

점심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대형 음식점 환기구를 통해 흘러나오는 냄새는 여기가 도심의 한복판임을 환기시킨다. 몇 년 전 한창 이 길이 정비되던 때 이곳을 지난 적이 있다. 포클레인이 늙은 매화 두 그루를 쓰러뜨리고 있었다. 그 곁을 맴돌며 목청이 찢어질 듯 울고 있던 직박구리는 어디로 갔을까? 그 봄날 보았던 늙은 매화의 흰 눈물을 잊을 수가 없다. 흰 눈물을 싣고 기차는 떠나가고 나는 이 초록 철길에서 새로운 매화, 어린 매화를 만난다. 이들이 잘 자라면 직박구리가 되돌아 올 것이다.

왼편 아파트가 끝나는 지점에 야트막한 산이 나타난다. 흙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벽을 쌓고 그 위에 개나리를 심어 한겨울인데도 노란 물결이 해운대 파도 따라 출렁이는 것 같다. 구름이 모여 사는 마을, 이름이 예쁜 운촌이다. 이곳에 자리한 ‘운촌마을회관·경로당’은 많은 이야기와 지혜가 가득한 고서 같은 느낌이다. 부산기계공고를 지나면 ‘흰 꽃이 피는 놀이숲’이다. 말발도리, 백철쭉, 조팝나무 등 흰 꽃들이 5,6월이면 그믐밤에도 환하게 길을 밝혀 주리라.

집을 나선 지 한 시간여 만에 흙을 밟는다. 옛 해운대역사와 정거장 주변은 기차가 달리던 그 모습 그대로이다. 이곳을 상업화하느냐 공원화하느냐로 갈등을 빚고 있다고 한다. 십여 년 전 뉴욕을 방문했을 때 맨해튼의 심장부에 위치한 센트럴파크가 신선하게 다가왔다. 뉴요커들이 그곳에서 운동하고 사색하고 휴식하는 모습은 참 부러웠다. 이곳이 해운대의 도심공원으로 자리매김하리라 믿는다. 눈앞의 이익보다는 멀리 내다볼 수 있는 혜안이 이 도심에 공원을, 초록의 힘을 선사하리라 기대한다.

옛 해운대역사 부지로 들어서자 젊은이들이 한 방향으로 향한다. 나도 초록 철길에서 내린다. ‘대한민국 최고 골목길 대상’을 수상한 해리단길이다. 지역골목상권이 젊은이들에 의해 활성화되고 있다. 도시재생사업에 어찌 명암이 없겠는가? 해운대구가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방지를 위해 상생협력하고 있다고 하니 다행이다.

“흘려보낸 시간들이 등을 켜는 오후에는/다 식은 찻잔 앞에 브람스를 기다린다/오랜 날 철걱거리던 완행열차 타고 올//누군들 그리 쉽게 어둠을 넘을라고/따라온 파도소리 흔적을 뒤척인다/잊을 것 잊었는데도 보푸라기 성가신//지워진 듯 여운 남은 낡은 책장 펼쳐두면/가끔씩 돌려 읽다 끼룩끼룩 갈매기소리/풍경에 노을을 입힌 새소리도 젖었다//(전연희 ‘해리단길에서’)”

휴식과 문화가 어우러진 공간에 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 앉는다. 갈매기소리가 철길을 걸어 내 곁에 앉는다. 세로로 오르기만 하는 도시를 살아가는 내게 가로로 길게 누운 초록 철길이 준 휴식, 초록의 힘이 편안하고 달콤하다.

시조시인
ⓒ국제신문(www.kookj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국제신문 뉴스레터
국제신문 네이버 뉴스스탠드 구독하기
국제신문 네이버 구독하기
뭐라노 뉴스

오늘이슈

 많이 본 뉴스RSS

  1. 1[부고]권영적(향년 90세) 부산시의회 (전)의장 별세
  2. 2[속보] 다시만난 부캉이, 부산항 국제여객터미널 부근 항만서 유영 확인
  3. 3[속보] 추미애, ‘예산 전액 삭감’ 경기도 순직 소방관 추모행사 참석
  4. 4[속보] 김정은, 중대장대회 지도.. "군사 혁명 다그치자는 것"
  5. 5부산·울산·경남 흐리고 비…모레까지 최대 120㎜ 이상
  6. 6제30호 태풍 '참피' 북상, 24일 오후 6시 기해 부울경, 전남 광주, 제주도 풍수해 재난위기경보 '주의' 격상
  7. 7제1247회 로또복권 1등 당첨번호 8, 14, 21, 22, 42, 45 … 8명 각 36억3744만 원 받아
  8. 8면세구역서 주운 담배 반출하다 걸린 직원, 징계 피해 퇴사 후 재입사
  9. 9[속보]통일부 “김정은 방중…오늘 신압록대교 통해 단둥 도착” 사망설 일축
  10. 10고리 3·4호기 '계속운전 허가' 27일 재심의…승인 여부 촉각
  1. 1[속보] 김정은, 중대장대회 지도.. "군사 혁명 다그치자는 것"
  2. 2[속보]통일부 “김정은 방중…오늘 신압록대교 통해 단둥 도착” 사망설 일축
  3. 3국힘 "與 신천지 개입설, 그토록 좋아하는 특검으로 밝히자"
  4. 4한동훈, "국제신문 1947년 창간 이래 부울경 민주주의 산 증인이자 발전의 버팀목, 끝까지 함께할 것"
  5. 5與, ‘혁명가 박정희’ 포럼에 “국힘, 역사 왜곡 정당이냐” 비판
  6. 6[속보] 국정원 "김정은 사망설 허위" 국회 정보위에 보고
  7. 7北 “국경선 확성기 외 새 대응수단 대기” 연일 대남 협박(종합)
  8. 8가덕 공사비 증액 ‘강제’ 아닌 ‘권고’…법개정 정부 초안 논란
  9. 9이 대통령, 최길수 특별감찰관 임명
  10. 10李대통령 지지율 소폭 상승해 40% 회복…부정평가는 50%
  1. 1고리 3·4호기 '계속운전 허가' 27일 재심의…승인 여부 촉각
  2. 2부산 주유소 휘발유 평균가 ℓ당 1837.8원… 전주보다 0.5원 ↓
  3. 3부산에 엔비디아 전용 생산라인 선다(종합)
  4. 4북극항로 개척자 “유빙·극한환경서 새 희망 봤다”
  5. 5서낙동강 수변입지에 4Bay 구조…실속 갖춘 59㎡ 단일평형 차별화
  6. 6부산시대 연 HMM, 올해만 6조원 투자
  7. 7로그인 없이 서버장악 가능…전 세계 ‘PHP’ 보안 비상
  8. 8[뭐라노] 북극항로 개척자들 “사투 끝 새 역사”
  9. 9"해양 위협하는 발전소 온배수, 5년간 바다에 3700억t 배출"
  10. 10[한 손 뉴스] 낙상·실종 막는 ‘스마트신발’…부산TP, 노약자 지원 확대
  1. 1[속보] 다시만난 부캉이, 부산항 국제여객터미널 부근 항만서 유영 확인
  2. 2[속보] 추미애, ‘예산 전액 삭감’ 경기도 순직 소방관 추모행사 참석
  3. 3부산·울산·경남 흐리고 비…모레까지 최대 120㎜ 이상
  4. 4제30호 태풍 '참피' 북상, 24일 오후 6시 기해 부울경, 전남 광주, 제주도 풍수해 재난위기경보 '주의' 격상
  5. 5제1247회 로또복권 1등 당첨번호 8, 14, 21, 22, 42, 45 … 8명 각 36억3744만 원 받아
  6. 6면세구역서 주운 담배 반출하다 걸린 직원, 징계 피해 퇴사 후 재입사
  7. 7한전, 사채 한도 19조 초과 위기에 '전기요금 인상론' 재개
  8. 8인천서 노루 사냥 엽총에 밭일하던 80대 부상... "앉아 있어 못 봤다"
  9. 9전북 전주서 승용차 가로수 들이받고 넘어져, 30대 운전자 사망
  10. 10[속보]서울 강서구 '모친 살해'혐의 40대 딸, 24일 구속심사 받아
  1. 1종합 6위 부산, 고른 활약에도 아쉬움
  2. 2만년 꼴찌 삼성 선두 ‘파란’…前 챔프 KCC 최하위 ‘수모’
  3. 3쇼트트랙 전설 최민정의 마지막 질주
  4. 4‘성폭행 의혹 제기’ 초교후배…기성용에 1억 배상해야
  5. 5‘높이’ 키운 BNK썸, 2년 전 영광 재현 노린다
  6. 6호랑이 발톱 세운 김도영…돌아온 사자 포효 최형우
  7. 7축구협회장 선거, 12월 18일 추진
  8. 8요트 하지민, 레이저급 정상…전국체전 16연패 역사 쓰다
  9. 9부산시설공단 여자핸드볼팀 전국체전 2년 연속 금메달
  10. 10마무리 캠프 코앞인데…롯데 감독·단장 인선 언제쯤
우리은행
10대 부산시의회 상임위 들여다보기
“학교 통폐합 지역 맞춤형으로 접근”
10대 부산시의회 상임위 들여다보기
해운기업 유치, 해사법원 신설 “해양수도 부산 경쟁력 키울 것”
강동진의 도시이야기 [전체보기]
바흐를 찾아간 나, 한국을 꿈꾸는 그녀
세계유산위원회, 부산의 시간을 세계와 나누다
경제프리즘 [전체보기]
소비 아닌 문화 생산 주체 오페라하우스
한국 갯벌의 2단계 확대 등재 의미
과학에세이 [전체보기]
진짜 질문의 시작
AI 시대, 부산 R&D의 대전환
국제칼럼 [전체보기]
원칙이 흔들린 대가
‘빵과 책’·양자경·강말금 그리고
기고 [전체보기]
‘2028 세계디자인수도 부산’의 과제
배의 피부를 지키는 기술은 도장이다
기자수첩 [전체보기]
금고 이사장 전횡, 지금도 진행중
엘리트 자평해온 市 공무원…생중계 회의서 능력 입증을
김준희의 클래식 인사이트 [전체보기]
여름의 끝자락, 브람스
여름날의 애상, 왈츠
김지윤의 우리음악 이야기 [전체보기]
다대포에서 만난 퇴계 이황
세종시대 음악이 전해진 이유
뉴스와 현장 [전체보기]
AX·반도체 전시회 5개 동시에 열렸는데…
북극항로, 첫 배보다 중요한 것은 다음 배다
도청도설 [전체보기]
if, 손아섭
교육이라는 희망
독자 투고 [전체보기]
새로운 시작 ‘황혼 이혼’
무료 화장실 깨끗하게 쓰자
메디칼럼 [전체보기]
25년을 간직한 리플렛 세 장
요추부 척추관협착증, ‘메포츠’로 극복하기
목지수의 도시브랜드 산책 [전체보기]
랜드마크 시스템의 시대
북항 돔구장에서 야구 보며 사우나를
박지욱의 뇌력이 매력 [전체보기]
건망증, 이렇게 잡자
운동으로 해마를 키우자
박진희의 컬처 픽 [전체보기]
‘부캉이’ 스펙터클에서 공존으로
부산 문화정책, 지금 필요한 선택
사설 [전체보기]
기초의회 의정비 증액, 합리적 기준이 필요하다
특별감찰관 부활, 임명보다 실질적 감찰이 중요하다
세상읽기 [전체보기]
‘이불 킥’의 순간에 도움 될 심리학 지식 한 스푼
문화예술의 시대
안재철의 연결하는 공간 [전체보기]
지구와 도시의 연결을 묻다
해양수도 부산, ‘제3의 경계 공간’
엄길청의 문전성시 [전체보기]
말과 현실이 너무 다른 부산
반도체와 부산
이보성의 미술 현장 산책 [전체보기]
두 미술관, 각자의 역할을 묻다
시장이 강해진 것일까, 비엔날레가 약해진 것일까
이상이 칼럼 [전체보기]
복지의 ‘필요 원칙’과 포퓰리즘
보건의료에서 지방정부 역할과 ‘정책 의료’
이정구의 맛과 건강 [전체보기]
미식과 오래 씹기
이제명의 오션 드림 [전체보기]
광복 81년, 다음은 바다의 산업 주권
HMM 부산 이전, 해양수도의 시험대
이홍의 세상현미경 [전체보기]
대규모 대미 투자, 기회인가 위협인가
국제질서의 지각변동과 한국의 성장경로
정쾌호의 부동산 탐구생활 [전체보기]
부산 아파트 10년, 이중 양극화와 위상 추락
미분양의 경고, 지방 맞춤 ‘출구전략’ 서둘러야
주재민의 명당을 찾아서 [전체보기]
사람은 갔어도 명당은 남아 있다
조선 8대 명당 중 하나인 정문도 묘
최태호의 와인 한 잔 [전체보기]
추석의 식탁, 가족을 잇는 와인
오스트리아 와인,빈의 시간을 마시다
특별기고 [전체보기]
‘해양수도 부산’ 토대부터 바로 놓아야
당론 따를지 역사 따를지 양심의 선택을
하순봉의 음악이야기 [전체보기]
박자와 기보
국민악파
황정수의 그림산책 [전체보기]
이대원의 ‘온정리 풍경’
유영국의 1957년 작 ‘사람’
CEO 칼럼 [전체보기]
청년 떠나는 지방, 수도권 인구 분산해야
거울 속의 외계인
  • 국제신문 골프대회
  • 맘편한 부산
  • 부산국제마라톤
  • BNK생명나눔챌린지
  • 유콘서트
걷고 싶은 부산 그린워킹 홈페이지
국제신문 대관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