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병원에 러시아 환자가 부쩍 많아졌다. 주로 사할린이나 캄차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암으로 진단되면 수술을 받거나 방사선 치료를 위해 부산을 찾는다. 지난 한 해, 필자는 열 명 정도의 러시아 환자들에게 방사선 치료를 해주었다. 수도권에는 모스크바에서 날아오는 환자도 꽤 된다고 한다. 이유가 무엇일까? 러시아에도 한류 의료의 바람이라도 불고 있는가.
냉전 체제 시절, 소비에트 공화국(소련) 또는 러시아라 하면 미국과 맞장을 뜨는 대국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땅덩이가 큰 나라, 미국보다 먼저 인공위성을 발사했고, 세계에서 최초로 원자력발전소를 짓고, 핵잠수함을 개발했던 나라다. 그런 나라에서 이제 방사선 치료를 받으러 멀리 부산까지 찾아 오는 것이다.
외국인이라 치료비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암으로 진단되고 중증환자로 등록되면 보험 수가의 1/10만 부담한다. 외국인들은 한국 보험 급여의 혜택을 받지 못하니, 보험수가보다 훨씬 높게 책정되어 있는 일반 수가를 적용받고 또 그 전액을 본인이 부담해야 된다. 어림잡아 같은 병을 치료하는 우리나라 환자들의 스무 배 정도는 지불해야 한다.
그런데 왜 하필 한국 의료를 선호하는 것일까? 지리적으로 가까워서 그런가. 대부분의 러시아 환자는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한국의 진료비가 의료수준과 비교하면 아직 무척 싼 편이라고. 그리고 유럽이나 일본, 미국은 터무니없이 높은 수가 탓에 치료받을 엄두도 못 낸다고 덧붙인다.
몇 년 전, 우리나라 유명 배우가 미국에서 뇌수술을 하고 한 달간 지불한 의료비가 5억 원에 달했다는 기사를 읽었던 기억이 있다. 보험이 없다면 그것이 정상적인 수가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나라 의료수가는 원가의 80%정도다. 보건복지부에서 인정한 수준이 그러하다. 시술하는 순간의 수고와 의료 행위에 부과되는 시간만을 책정한 금액이다. 의사가 되기까지 투자한 세월과 노력은 충분히 고려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같은 행위를 하는 동물 병원의 시술보다 값싼 항목도 많다.
어쩌면 현행 의료수가 제도는 의사들을 진료에만 집중할 수 없도록 조장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대형 병원에서는 특진비와 고급 병실료를 높게 책정하고, 인건비가 싼 전공의 인력을 24시간 풀가동하여 적자를 면하고 있다. 중소병원이나 개업의들은 보험항목에 해당되지 않는 의료행위를 개발하기 위해 안간힘을 쓸 수밖에 없다.
의과대학 졸업생들이 전공과목을 선택할 때 상대적으로 수련기간을 수월하게 보낼 수 있고, 비(非)보험 항목을 시술할 수 있는 전문 분야로 몰리는 것은 어떻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안피성’(안과·피부과·성형외과)이니 ‘정재영’(정신과·재활의학과·영상의학과) 이니 하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생명과 직결되는 의료행위를 하는 외과계 전공 과목은 전공의를 구하지 못해 난리다. 이런 상황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더구나 이 같은 분야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수가라 미래가 보장되지 않으니 상당 기간 젊은 의학도에게서 외면당해 왔다. 그래서 교수들이 철야 당직을 하는 곳도 많다.
훗날, 어쩌면 우리는 급박한 심장 수술이나 뇌 수술을 받으러, 요즘 러시아 환자들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 비싼 진료비를 각오하고 먼 나라로 가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 의료계는 원가에도 미치지 못하는 의료수가 때문에 정부에 현실성 있는 수가를 인정해달라고 매달리고, 어느 나라는 의료 수준이 열악해 쌈짓돈을 싸 들고 우리나라에 와서 진료를 받는다. 이 무슨 가당치도 않은 아이러니인가.
러시아에서 부산으로 온 환자들은 방사선 치료비 부담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치료 기간을 단축해 달라는 부탁을 자주 해온다. 그러기 위해선 날마다, 일 회 조사하는 방사선량을 증가시켜야 한다. 부작용이 심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래도 과도한 치료비가 나오지 않도록 배려해 주어야 할까.
누가 의술(醫術)을 아름답다 했던가.
동아대병원 방사선종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