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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도설] 부울경과 재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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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이라는 말이 처음 쓰인 것은 일제강점기인 1932년이다. “자기 땅만 밟고도 전라도 일대를 다닌다”고 했을 만큼 대지주였던 고창 김씨 일가(김성수·김연수)가 경성방직 남만방적 삼양사 등을 설립해 사업 영역을 확장하자 이 기업 집단을 가리켜 기자들이 붙인 용어다. 재벌의 시초는 호남이지만 재벌을 키운 곳은 경상도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지정한 59대 대기업 집단 가운데 부울경에 뿌리가 있거나 이곳을 무대로 사세를 키운 기업은 22곳이나 된다. 특히 상위 30위에 15곳이 포진해 있다. ‘빅5’ 중에는 SK를 제외하면 4개 기업 모두 창업주의 고향(삼성 LG 롯데)이나 사업 기반(현대)이 여기 있다. “솥의 다리가 뻗은 세 방향으로 반경 20리 이내에 큰 부자가 난다”는 진주 남강의 솥바위 전설이 맞아떨어진 걸까. 경남 의령에서 삼성 이병철 회장이, 지수에서 LG 구인회 회장과 GS 허정구 회장이, 함안에서 효성 조홍제 회장이 태어났는데 모두 20리 내이다. 부산 서구 서대신동에선 LG가, 부산진구 전포동에선 CJ가 시작됐다. 피란시절 현대 정주영 회장이 토목사업을 개시한 곳도 부산이다.

부산이라는 도시가 해방과 6·25전쟁 이후 급성장했다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은 아니다. 1876년 개항 후 30년 만에 인구는 이미 경성에 이어 두 번째로 많았다. 일제강점기부터 평양이 아니라 부산이 한반도 제2의 도시였던 것이다. 이 시기 부산은 만주와 일본을 연결하는 창구였다. 바다를 낀 항만과 내륙 철도 덕분이었다. 일본과의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시장이 발달하고 공장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평양 대구 전주같은 전통적 도읍지와 달리 토박이가 적은 부산은 타향 출신 기업가들에게 너그러웠다. ‘도시의 공기가 자유를 만든다’는 독일 속담처럼 부산은 기회를 찾아 전국에서 모여든 사람으로 북적이는 용광로였다.

작년과 올해 한국 경제를 일으킨 기업인의 부음이 잇따랐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과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에 이어 지난 19일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의 타계로 5대 그룹 창업 1세대 경영인의 시대는 완전히 막을 내렸다. 신 회장은 어제 고향인 울산시 울주군 선영에 묻혔다. 1세기 가까이 살면서 한일 양국의 대기업을 성공적으로 일군 그가 향수에 젖어 43년간 잔치를 베풀던 둔기마을이다. 우리나라 재벌 1세대의 공과에 대해선 여러 견해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들 덕분에 수많은 사람이 먹고 자고 입을 수 있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강필희 논설위원 flute@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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