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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숲길] ‘토포필리아(장소와의 정서적 유대감)’와 고향 부산 /배미애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20-01-23 19:01:34
  •  |   본지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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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부산 영도의 한 조선소에서 낡은 창고에 전시된 설치작품을 관람한 적이 있다.

바다에 떠돌던 보잘것없는 작은 표류목으로 만든 그네가 전시장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었다. ‘영도스윙’. 그네에 걸터앉아 눈앞에 펼쳐진 영도바다를 바라보는 순간 어릴 적 기억과 함께 만감이 교차하며 가슴이 먹먹해졌다.

아! 부산, 나의 고향. 걸터앉은 각목처럼, 흔들리는 그네처럼 저 바다 위를 부유하듯 지난한 세월을 견뎌오는 동안 잊고 살았던 나의 삶의 터전, ‘부산’은 분리될 수 없는 또 하나의 나 자신으로 마음 한구석에 늘 자리 잡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나는 인간주의 지리학자 이푸 투안(Yi-Fu Tuan, 段義孚)을 존경하며 공간과 장소에 대한 그의 관점과 해석에 공감한다. 그는 사람이 살아가는 자연 혹은 인문환경을 깊은 정감과 사랑의 대상으로 보았다. 사람은 경험과 감정, 그리고 자신만의 문화를 가지고 어떤 공간과 접하게 된다. 시간이 흐르고 경험이 누적되면서 막연히 추상적이었던 이 공간은 친밀하고 의미 있는 장소가 된다. 이 과정에서 사람의 감정은 장소에 이입되면서 유대관계를 형성하게 되는 데 이푸 투안은 이러한 장소와의 정서적 유대감을 토포필리아(topophilia)라 불렀다.

진정한 장소감과 토포필리아는 장소를 내부에서 경험할 때 더욱 분명해진다. 어떤 장소를 내부에서 경험한다는 것은 그곳에 소속됨으로써 그곳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가장 보편적인 ‘내가 속한 장소’는 ‘고향’이다. 지리학자 얼스터 보넷(Alastair Bonnett)은 인간의 사고와 애착은 특정 장소와의 관계에서 형성되며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만든 장소에 애정을 갖는다고 했다. 따라서 인간에게 고향은 어린 시절 자신의 감정이 개입된 경험과 사건들로 인해 매우 의미 있고 애정 어린 장소가 된다. 복잡다단한 현대사회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이 일상이 된 요즘 고향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물리적, 심리적으로 찾아가고 싶은 그리운 장소가 되는 이유이다.

바다와 산과 강을 아우르는 부산의 아름다운 자연환경은 우리 고향의 자랑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조화롭게 적응하며 살아온 부산 사람의 자부심이기도 하다. 이러한 자연환경을 토대로 오랜 세월 삶의 흔적을 켜켜이 쌓아 올린 부산의 장소성은 분명한 개성을 드러내고 있다.

부산에 대한 토포필리아도 이러한 과정 속에서 우리들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본의 논리가 지나치게 공간형성에 개입한 결과 안타깝게도 부산의 장소성은 급격하게 변질되거나 소멸되었다. 결국 우리는 물리적 혹은 심리적으로 ‘장소’, 특히 ‘고향’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해 있다.

토포필리아가 사라지면 우리는 자기 자신이 누군지도 모른 채 다가올 변화에 늘 긴장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또 우리 중 일부는 자본의 흐름에 편승해 또 다른 자신인 소중한 장소와 고향을 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나의 고향, 부산이 나의 소중했던 기억을 여지없이 소환하여 현재를 견디게 하는 힘을 준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변질되거나 사라진 장소성으로 인하여 ‘부산 아닌 부산’이 된 나의 고향에서 마음의 장소를 잃어버린 채 결국 헤매며 살아가야만 하는 것은 아닐지 무척 걱정이다.

전남 광양 포스코 광양제철소 안에는 ‘서취도’라는 조그만 섬 하나가 자리 잡고 있다. 제철소 건립을 위해 광양만을 매립하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섬은 사라졌지만, 섬 주민이 살았던 장소, 즉 그들의 아름다운 고향 한 곳은 그대로 이 섬으로 남아 있다. 장소에 대해 이푸 투안과 생각을 같이한 한 설계 결정권자의 인간적이고도 현명한 판단으로 고향은 기록되고 남겨졌다. 섬 주민은 그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미래를 살아갈 큰 힘을 얻은 것이다.

서취도를 교훈삼아 모든 사람이 이푸 투안의 감수성으로 고향과 자신을 지켜나가기를 빈다. 그리고 나의 과거이자 현재이고, 또 미래인 나의 고향 부산도 더 이상 훼손되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러면 나는 나만의 토포필리아를 회복하여 삶이 힘들고 지칠 때 언제든 나의 고향 ‘부산’으로 달려갈 것이다.

갤러리아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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